팀의 공통적인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공통의 원인을 찾아냈다. 40분짜리 드라마를 보다가 30분 타임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시점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팀에서 존재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1. 팀원 몇 명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일부는 특별히 힘들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힘들어했다. 이들의 힘듦은 단순히 '힘들다'가 아니라 겨우 버티고 있는 느낌이었다.
2. 고연차임에도 불구하고 연차에 맞는 일을 받는걸 두려워했다.
'힘들다'라고 말한 후배들에 대해 일일이 면담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해봤다. 그렇게 주워들은 이야기들에서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나온 말이 있었다. 그게 바로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문제점의 원인이었다.
A 대리 : "제가 귀하게 자란 자식이잖아요. (힘든 프로젝트를 가지 않았다는 의미)"
B 사원 : "전 운이 좋아서 대부분 좋은 프로젝트를 했어요."
C 팀장 : "D 대리가 입사해서 대부분 프로젝트를 E 부장이랑 했더라고. (좋은 프로젝트를 했다는 뜻)"
처음엔 좋은 프로젝트를 간 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후배들이 E 부장님과 프로젝트를 가면 사실 축하해주고 다행스러워했었다. 좋은 프로젝트를 가게 되었으니 이제 걱정할 거 없다고 다독여주고 많이 배워서 나오라고 했었다. 근데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했었다.
이름하야 '좋은 선배 부재 증후군'이 발생했다. (내가 지어낸 이름!) 이름하야, 계속 좋은 선배랑 프로젝트를 하다가 그 선배와 떨어졌을 때 발생하는 불안, 두려움, 공포... 즉, '힘듦'을 야기하고 '버티게' 만드는 증후군이다.
이 문제가 있는 팀원들은 모두 E 부장이라는 사람과 꾸준히 프로젝트를 해왔다. 1~3년 차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모든 프로젝트의 경험이 E 부장과의 프로젝트이거나 가장 마지막 프로젝트가 E부장님과의 프로젝트였다. 즉, 그들이 경험한 것은 E부장님의 일하는 방식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E부장이 어떻길래?'라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자면, E 부장님은 A부터 Z까지 본인이 다 하는 사람이다. PL이어도 실무자가 할 일까지 다 하고, PM이어도 실무자가 할 일을 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실무자(여기선 후배들)에겐 최고의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왜냐, E 부장이 다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을 나눠줘도, 해야 하는 일의 A부터 Z의 순서와 내용을 다 설명해주고 리뷰하고 수습해주실 분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분과 일해본 사람으로서 이게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유일한 차이점은 난 구를 만큼 구른 상태에서 이 분을 만나 일했기 때문에 E부장과 E부장 미니미같이 쌍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우린 업무를 나눠서 같이 일을 했고, 서로 리뷰를 해줬고, 같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야근을 해왔다. 우리는 동료에 가까운 사이였지 내가 의존을 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후배들은 그런 관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간과했다. 모든 디테일을 본인이 직접 파악하고 일을 나눠주는 E부장과 일했으니 이 후배들은 디테일을 파악하는 방법도, 일을 하는 방법도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조금 부족해도 마무리를 E부장님이 다 해줬을 테니 부담이 없었을 것이다. 뭘 잘못했는지 설명이나 해주셨을지 의문이다. 혼내지도 않으셨을 거고, 모두 다 야근 안 시키고 혼자 다 커버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극찬했다. E부장님과 일하고 싶다고. 나도 같이 일해본적이 있었으니 '그럼 그럼 E부장님 좋으시지~ 나도 같이 일하면 좋지'라고 생각해버렸다. E부장님과 영원히 같이 일하지 못하는 우리의 환경에서 이 후배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도 못한 것이다.
E 부장이 사라지자 모든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E 부장 덕에 편한 프로젝트 생활을 해오던 어린 새들은,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새가 사라진 현실을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난 이제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타개 해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업무가 100개면 할 수 있을 10개만 나눠서 주던 E부장이 사라지자 업무 100개를 고스란히 떠안고는 우선순위에 맞게 업무를 배분하고 하나씩 처리하는 걸 하지 못했다. 일이 너무 많아 거기에 치여서 힘들다고 울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행복하느라 E 부장이 여태 그걸 다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사실 지금도 모른다. 왜냐면 E 부장은 그런 사람이니까(능력자), 그리고 E부장이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들로선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E부장은 나를 만날 때면 힘들다고 하셨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힘들다고, 밑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에게 업무 지시를 일일이 해주기가 힘들다고, 차라리 본인이 하면 더 빠른데 그럴 수가 없어서 챙기느라 힘들다고 그러셨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도 후배들은 그걸 몰랐고, E 부장은 지쳐갔다.
E 부장님은 지금 혼자 프로젝트를 들어가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외롭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편안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사원 시절에 E 부장님은 후배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후배를 달라고도 안 하셨고 키우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당시 팀장도 이 분에게 후배를 붙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과장 3년 차가 되는 사람이 이 분과 프로젝트를 한 이후 최근에 본사로 복귀했다. E 부장님과 일하는 게 너무 좋았고, 드디어 해보고 싶은 일을 너무나도 재밌게 했다고 사방팔방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었다. 그런 이 과장에게 '제안 PM'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수행 PM도 아니고 제안서만 챙겨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아래의 연차인 사람들(슈 과장 포함)도 거쳐갔던 일이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주어진 일이었는데 이 과장님은 그 말을 듣고는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짓더니 결국 울면서 퇴근을 했다.
울면서 떠난 그분을 뒤로하고 우리는 황당함에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왜 울지? 못하면 못한다고 하지 이게 울 일인가?' 어이없어한 나와 달리 팀장님은 제안 PM을 교체하셨다. (와, 울면 되는 거였어?)
'좋은 선배 부재 증후군'은 어쩌면 한 명의 능력 있는 선배에게 모든 후배들을 맡겨버린 우리 팀을 꾸짖기 위해 존재하는 증후군 인지도 모른다. 힘들었어야 했던 프로젝트를 편안하게 지나가버린 후배들을 혼내기 위해 발동하는 증후군 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좋은 선배는 좋은 후배를 키우지 않은 채 영원한 아기로 남게 만들어버렸다. 우리 팀은 이 '좋은 선배 부재 증후군'으로 인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 후배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다 뺏기게 생겼다. 조금 더 용감할 때, 조금 더 아무것도 모를 때 도전을 할 기회를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생을 덜 시키기 위해서 일 잘하는 선배에게 붙여주기 급급했다. '일 잘하는 선배'가 엄밀히 '좋은 선배'는 아닌데 말이다.
놀라운 건.. 내가 E부장의 미니미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잘 안다. 100개의 업무가 있으면 난 10개만 후배에게 주고 나머진 다 내가 한다. 후배가 해온 걸 보고 피드백을 줘도 혼내지 않았다. 내가 고쳤고 내가 마무리했다. 나와의 프로젝트가 좋은 경험이기를 바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데에 급급했었다. 근데 이게 이 후배의 성장을 방해했다 생각하니, 다소 반성이 된다.
이제야 왜 회사는 내가 연말에 100%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 고과를 최고로 주지 않고 중간 고과를 주는지 알겠다. 언제나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할 수 있게 달려야 하는 것이었다. 우린 후배들이 그렇게 달리지 못하고 100%만 할 수 있게 해 버린 것이다.
내년엔 후배들이 달리게 해야겠다. 달리다가 넘어지기 전에 멈추게 하는 선배가 아니라 달리다가 넘어지면 흙 털어주고 상처에 약 발라주는 선배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언젠가 내 밑을 떠나 프로젝트를 하러 가면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해야겠다.
혹시 내가 이런 선배라면, 내가 이런 선배랑 일하고 있다면 주의하도록 하자. 성장은 언제나 현재보다 조금 더 하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자. 매해 작년보다 조금 더 해내야 하는 상황이 끝없는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이 두려움도 결국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제안 PM'을 하라고 누군가 말해도 '까짓 거 뭐, 올해 처음 해보지 뭐'라고 손 걷어붙이고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언젠 뭐, 쉬운 일 했었나?)
그리고... 울지 말자. 혹시나 내가 참지 못한 불안함으로 인해 울었는데 그로 인해 업무가 변경되었다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창피해하도록 하자. 이건 도저히... 회사에서 있을 수 없는 문제 해결 방식이다.
2021.12.1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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