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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안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총체적 난국인 제안은 오랜만이었다. 여러 가지 난국 변수들이 있었지만 오늘 이야기하려는 변수는 '제안 경험이 없는 주니어의 참여'다.

 

뒤늦게 제안팀에 합류해서 제안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내 눈에 보인건 그저 발랄한 주니어들이었다. 제안이 처음이라며 궁금한 것도 많고, 신기해하는 모습이 가득이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질문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제안을 하는 모습을 봤다. 동기가 아니지만 동지가 있다는 게 저런 기분이었지... 하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들보다 한참 베테랑이었던 나로서는 그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좋다 생각했다. 다른 팀의 나라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안서 제출일이 다가올 수록, 제안을 여러 번 했던 시니어들의 심적 여유가 사라지고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그 모든 예민함이 주니어들에게 비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질문 하나를 해도 차가운 대답과 매몰찬 핀잔이 돌아오면서 주니어들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애써 웃으며 받은 지시를 복창하는데, 그 마저도 틀려서 시니어에게 또다시 혼나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그 얼어붙은 제안실에서 그 주니어들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나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었다. 몇 개월전부터 준비했던 사람들과 달리 마지막에 사람 손이 부족하다고 지원을 들어왔기 때문에, 사업의 히스토리도 몰랐고, 업무도 내가 보통 하는 인더스트리가 아니라서 몰랐다. 그래도 질문을 했다. 같은 시니어들에게 질문했다. 그들은 바빠서 나에게도 차가울 때가 있었지만("이런 건 그냥 알아서 하시면 안돼요?"), 그래도 꿋꿋이 질문하고, 답을 얻어내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분에게 물어보러 갔다. 물어보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기분이 상해서 이럴 거면 이 제안실에서 일을 왜 돕나 싶기도 했고, 나한테도 저렇게 화내면 짐 싸들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나와 주니어들은 너무나 달랐다. 제안 마지막 주에 나는 제안실에서 모든 걸 적응해서 내가 공지하고 통보하고 시니어들에게 일도 던져주고 훌훌 돌아다녔다. 하지만 주니어들은 질문하는 것이 무섭다고 나에게 와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이런걸 하라고 하시는데, 어떤 걸 하면 되는 건가요?"), 한 명은 PPT 손댔다가 잘못해서 세게 혼나는 바람에 장표를 원복 하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만 왔다 갔다 해서 안쓰러워서 내가 괜찮다고 하며 하나하나 원복 해줬다.

 

이 차이는 왜 나오는 걸까? 정말 제안을 몰라서? 처음이라서? 더 어려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니어들이라고 해봤자 나랑 2살 차이, 경력 4년 차이였다. 신입사원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질문을 할 때 당신은 왜 질문을 하는가?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상대방의 의중을 몰라서?

그렇다면 왜 뭘 해야하는지 모르는 걸까? 처음이라서? 방법이 여러 가지라서? 

왜 처음인 이 상황에 처하게 된 걸까? 내가 자진해서? 상사가 시켜서?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면 아마 대부분 대동소이한 답이 나올 것이다. '윗사람이 이 일을 하라고 시켰고, 난 이 일을 해본 적이 없고, 그래서 윗사람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라고.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을 때 더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도 '처음 해봐서 한 번 듣고 모르기 때문에'라는 답보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게 이게 맞는지 몰라서'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질문을 하겠다. "그걸 물어보는 데 왜 당신이 위축되는 거죠?"


난 이렇게 생각한다. 다 같이 하는 일에, 돕는 일에, 나만을 위하는 일이 아닌 일에 질문을 하는 건, 당당하게 물어봐도 된다고. 바쁜 사람 불러서 내 옷을 골라달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 연애 상담을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쉽게 예를 들면 오늘 모두가 일하느라 바빠서 팀 점심을 배달시키기로 했는데 '뭐 드실 건가요?'라고 물어보는 데에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알아서 주문해 주면 안돼요?''라고 누가 짜증내면 위축될 일인가? 대다수가 고른 거 하나 더 추가하고 속으로 '그러고 후회하지 마라' 하면 되는 일 아닌가.

 

몰라서 창피하다 생각하면 그럴 필요 없다. 이 일을 20년 한 사람보다 더 잘 알 방법은 없다. 그리고 20년 한 사람의 고집과 원칙은 처음 하는 사람이 맞출 방법이 없다. 그러니 '처음이니 당연히 모르지'라고 생각하며 물어보면 되고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면 겉으로는 '네네'해도 속으로는 '처음이니 당연히 모르는데 왜 화를 내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나도 시니어 한 분의 장표를 수정해서 리뷰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짜증 내셔서 '작성자이신데 컨펌해주셔야죠 ^^'라고 겉으로 대답하고는 속으로 '그냥 고치지 말아 버릴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분의 짜증이든 핀잔이든 무엇이든, 심지어 '업무를 모르셔서 잘못 고치셨어요'라고 나한테 모라했어도, 나는 '아 그래요? 업무를 몰라서 틀렸나 보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생각하고 알려달라고 했다.

 

기분은 상했을지언정 내 자존감을 상하게 하진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처음 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게 두렵다면, 뭐든 물어보면 상대방이 혼낸다고, 그래서 물어보기 싫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상대방(또는 모두)의 일을 돕기 위해 질문을 하는 거라면 조금 더 당당해져도 된다고. 못 알아들어서 혼나면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세요'라고 말해도 된다고 말이다. 당당하게 묻고, 당당하게 되물어도 된다는 말이다. 

 

물론 눈치는 있어야 한다. 누가 봐도 독화살이 날아올 순간에는 묻지 말자. ^^ 

 

2024.06.1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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