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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주의자까진 아니지만, 실수를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일하면서 실수하면 주위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스타일이다. 고객 앞에서 당황해서 늘어놓은 헛소리 때문에 '내일 어떻게 회사를 나가지...? 퇴사를 해야 하나?'라고 밤새 고민할 정도의 성격이다. 주변 사람들이 괜찮다고 백 번을 말해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후회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불쌍한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눈에 차가운, 빈틈없는 성격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 보니 결국 회사 생활이 힘든 건 나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수하거나 당황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했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하기도 했다. 뭔가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스스로에게 더 힘든 길을 걸어가게 할 것 같았다.
 
혹시 오늘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내가 터득한 방법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그런 마음으로 작성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넘어지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면, 과거에 넘어졌던 이야기를 하자.'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분명 나는 과거에 실수를 했었을 거고, 당황한 일이 있었을 거고, 밤에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 이불 킥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면서 웃어넘기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잘 들어, 나도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야. 우습지 않아?', '내가 예전에 이런 실수를 했었어, 어이없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어때, 완전 대박이지?'라는 느낌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좋은 점은 1) (상대방이 후배면) 누군가의 시행착오와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과의 거리감을 줄이고 본인의 시행착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2) 내가 나를 쥐어박았던 이야기를 웃어넘기는 연습을 함으로써 미래의 내 실수에 관대해지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념으로 내 창피해던 과거 이야기를 몇 가지 해보겠다.
 
 
1. PPT리뷰 중에 탈탈 털려서 멘탈 부서진 이야기
 
대리 시절에 처음 같이 일하게 된 분들과 보험사를 위한 자료를 만들 일이 있었다. 보험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자료 앞에 써야 하는 시장 현황 내용을 쓰기 싫어했던 부장님들 때문에 그 부분을 내가 쓰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 나름대로 짧은 시간에 열심히 장표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보험사 담당 팀장님 앞에서 리뷰를 받았는데, 그분의 눈에 '이런 허접한 자료는 처음이야'인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그 팀장님은 원래 리뷰가 혹독하기로 유명한 덕분에(나중에 알게 된 사실) 그 자료 리뷰에서 나는 탈탈 털려야 했다.

'알고 쓴거냐', '이건 이래서 틀렸다', '이건 모르고 쓴 거다', '이 표현은 또 뭐냐', '저런 단어는 보험사에서 쓰지 않는다', '이건 성의가 없는 거다' 등 끝없이 박살을 내셨다. 나는 아직 장표 1장 중에 1/4 정도 리뷰를 한걸 보면서 나머지 3/4는 얼마나 뭐라 할까를 생각하면서 멍하니 쳐다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다. 어떤 멜로디가 들려서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하면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소리가 내가 낸 거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너무 듣기 싫은 나머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화들짝 놀라서 그만하고 나머지 리뷰를 들었는데 그 순간에 딴 생각을 하면서 콧노래 부르는 동안에 받은 피드백은 그때 듣지도 못했고 당연히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머릿속에는 쿠쿠다스 같은 내 멘탈이 가루가 되어서 박살 났을 뿐이었다.
 
 
2. 신입사원 때 팀장님 차에서 상석에 앉은 이야기
 
신입사원 때 이야기다. 팀장님과 사는 동네가 비슷해서 퇴근하는 길에 내려주신다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얻어 탔다. 나는 장롱 면허기도 했고 팀장님이 엄청 비싼 차를 몰았기 때문에 팀장님께서 운전을 하셨는데 나는 팀장님이 어디 앉으라는 이야기가 없어서 알아서 어딘가에 타야 했다.
 
회사 입사할 때 상석에 대한 교육을 다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순진무구했던 나는, 집에서 그러하듯이 자신 있게 뒷좌석에 탔다. 그것도 팀장님이 운전석에 계시니 배려해서 바로 뒤가 아닌 대각선 뒤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앉았다. 그때 팀장님의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표정. '쟤가 왜 저기 앉아?' 하는 표정. 그날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팀장님은 내가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 거였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은 없지만, 난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고 있다. (어디에 앉아야 했냐고? 당연히 조수석!)
 
그 팀장님과는 더 이상 같이 일하지 않지만 회사에서 차를 탈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때의 일이 생각난다. 아마 평생 날 따라다닐 이야기겠지.ㅎㅎ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 팀장님에게 여전히 놀랄 따름이다. 
 
 
3. 캐시/쿠키 때문에 크롬 브라우저에 비키니가 나왔던 이야기
 
동기 중에 회사에서 항상 딴짓하는 동기가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메신저로 맨날 자기가 가고 싶은 곳, 사고 싶은 물건의 링크를 신나게 보내고는 했다. 항상 그걸 보면서 나는 다 괜찮다는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쳐주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비키니를 살 거라면서 온갖 비키니의 제품 링크를 나에게 보내줬다. 그걸 보면서 '이야~ 이런 걸 입겠다고?ㅋㅋㅋ'하면서 답장을 했는데, 그 브라우징 이력이 쿠키로 남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가 웹사이트 방문 기록을 토대로 구글이나 크롬 브라우저 배너에 광고로 다시 그 제품이 재등장하기 시작했던 때다.)
 
업무 특성상 막내인 내 PC를 빔 프로젝터에 연결해서 리뷰를 해야 했는데 PPT를 보다가 상사가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해 봐요'라고 말을 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크롬 브라우저를 열어서 검색을 했다. 그때 열었던 신문기사 옆 광고 배너에 그 형형색색의 비키니가 나올 거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하고...
 
모두 그 화면을 보고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비키니 살거니?'라고 물었을 수도 없었을 상사 아저씨들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ㅋㅋㅋㅋ 그때는 내가 화끈화끈했는데... 지금 생각하면...ㅋㅋㅋ 그냥 웃기다.ㅋㅋ 


나도 결국 1년 차부터 쭈욱 연차를 쌓아온 사람이라 실수하는 것은 별 수 없다. 저 위의 이야기들 중 첫 번째는 '나쁜 상사', '탈탈 털린 이야기'하면 고생담으로 종종 이야기는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는 아직도 말로 못한다. 아직도 말하기 부끄럽달까. 말하면서 내 얼굴이 빨개질까 봐 두려워서 말 못 한다.ㅋㅋ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분명 즐거워할 거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나도 저런 실수를 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반갑겠지.
 
난 아직도 후배들과 리뷰를 들어가면 팀장님 외 상사들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걸 두려워한다.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무능해 보이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완벽한 모습을 언제나 보여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간다. 잘 대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건설적으로 정리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자고. 피드백에 대응하는 방법을 내가 후배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부정적인 피드백이 나오면 나와서 후배들 앞에서 웃는 걸 잊지 않는다. '탈탈 털렸네요?ㅎㅎㅎ'라고 하거나 '더 심할 줄 알았는데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네요'라고 말한다. 나도 긴장하는 선배고, 나도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언제나 은연중에 알려주려고 한다. 그들을 위해서? 아니, 이건 나를 위해서.
 
나도 결국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나 잊지 않기 위해서!
 
2023.03.1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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