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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4년 차 후배랑 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이 후배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대리 시절에 인턴으로 받아서 끔찍한 케어를 하면서 정규직으로 입사시킨 아이다. 

 

궁금하다면 지난 포스팅 참고

2020.04.22 - [슈르의 오피스라이프/슈르의 오피스 이야기] - 팀 인턴을 정규직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이야기

 

팀 인턴을 정규직 전환시키는데 성공한 이야기

오늘 포스팅은 그냥 수다 떠는 걸로 하기로 했다. (일 생각이 하기 싫은 날...이라고 해두겠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슈 과장을 보고 계십니다. ^^) 과거 오피스라이프에 대한 수다를 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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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후배를 기껏 정규직으로 합격 시켜놓고도 같이 일하는 데에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워낙 사람이 부족한 팀이었으니 이리저리 나뉘어서 일하다 보니 사원-대리가 같이 일할 수 있는 럭셔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과장이 되고 나서야 이 후배가 내 아래로 다시 오게 된 것인데, 이 후배는 아직 인턴의 눈빛으로 나를 우러러보고 었었다. 자그마치 6년 차이가 존재하니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가만히 이 후배를 관찰해보니 아직 본인의 연차만큼 성장하지 못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4년 차면 무얼 할 수 있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하더라도 회사/업무마다 다르기 때문에 대답은 생략하겠다. 그저, PPT 보고서를 써야 한다면 전체의 스토리를 잡지는 못해도 장표 한 장의 스토리를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그걸 못했다.


내 후배는 그렇다치고 이제 PPT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PPT 보고서는 장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1장짜리를 만들 수도 있고(흔히 말하는 1페이지 보고), 수천 장이 될 수도 있다.(예: 제안서) 그런 다양함을 가진 PPT 보고서이지만 결국 이런 보고서도 1장들의 모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1장의 중요도를 작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1장은 대충 넘어가는 장표여도 되지'), 반대로 생각해보면 모든 1장은 동일한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둘 중에 어느 게 맞냐면, 후자가 맞다. 그렇다고 모든 PPT가 결론 장표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장표가 자기의 역할을 갖고 자기 소리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론을 맡았다면 서론의 역할을, 본론의 역할을 맡았다면 본론을, 결론의 역할을 맡았다면 결론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잘 와닿지 않는다면, 도미노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에게 주어진 것은 무수히 많은 도미노들이고 시작점과 끝점이 있다. 그 외에는 당신이 그 도미노들을 들고 정해야 한다. 이때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다.

 

1) 개수

주어진 100개 도미노 중 50개만 써서 시작에서 끝까지 갈 수 있다면 50개만 쓰면 된다. 

 

2) 색상

원하는 도미노의 색상을 골라서 무지개색 순서로 하든, 좋아하는 색 순서로 하든, 한 가지 색상만 사용하든, 취향 껏 자유롭게 하면 된다.

 

3) 모양

직선으로 최단거리를 계산해서 가도 되고, 구불구불하게 배치해도 되고, 중간중간에 장애물이나 기하학적인 도형 모양으로 만들어도 된다. 뭐든 시작점에서 끝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 외에 다양하게 많을 것이다. 여기서 1) 개수는 PPT의 페이지 수, 2) 색상은 테마, 3) 모양은 전개 방식/Approach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건 '도미노' 그 자체, 그리고 '도미노 간의 거리'다.

 

당신은 PPT를 반드시 사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리 귀찮아도 도미노 간의 거리를 잘 계산해야만 한다. 너무 붙어도, 너무 떨어져도 안 되는 게 도미노 간의 거리다. 이 도미노 하나만 잘못되어도 당신의 도미노는 끝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바로 이 사실을 사원들은 간과한다. 단 하나의 PPT 장표도 대충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맡은 장표는 백업 장표야. 별로 안 중요해'

 

'내가 맡은 장표는 예시/사례 장표야. 별로 안 중요해'

 

'내가 맡은 장표는 눈 내리는 이야기야. 그냥 사실 정리하는 거라 별로 안 중요해'


착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안중요한 장표였으면 애초에 만들지를 않는다. 사원들 교육시키려고 실습용으로 장표를 나눠줄 만큼 여유가 넘치는 선배도, 보고서도 없다. 물론 만들다가 날려버리는 장표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 계산하고 막내에게 나눠주지 않는다. 아무리 선배가 '안 중요하다'라든지 '대충 해'라고 말해도 그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정말 안 중요했다면 없애버리지, 시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후배에게는 저런 장표를 시키는 걸까. 그건 아주 간단하다. 사례/사실 정리 장표는 대체로 PPT의 앞과 뒤의 내용을 몰라도 만들 수 있는 장표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앞/뒤의 내용까지 고려해가면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 레벨은 아직 되지 않는 것이다. 도미노의 전체 방향, 흐름, 각각의 역할을 아는 사람이 따로 있고 좌표를 갖고 일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보면 그런 것이다. 큰 그림을 보고 다 이해하며 '아 내가 놓는 도미노는 이런 역할을 하는 거야'라고 일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단 도미노 하나를 알려준 위치에 넣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료가 고민 없이 만드는 장표라는 것은 아니다. 고민이 덜 들어가는 장표일 뿐이다.

 

예로, 이번에 후배에게 세일즈 팩에 들어갈 장표 중에 '규제 준수' 장표를 정리해오라고 했다. 준수해야 하는 규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잘 준수했는지를 정리해오라고 했다. 그런데 나한테 돌아온 장표는 준수해야 하는 규제만 정리되어 있는 장표였다. 백업 장표 같은 본 장표가 온 것이다.


모든 페이지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없다면 그 장표는 없는 것이 많다. 고객이 자기 시간을 들여서 당신의 설명을 듣는데 목적이 없이 내용을 설명한다면 고객은 지친다. "so what?"라는 질문에 대답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처럼 '규제 준수'와 관련된 거였다면 '당신이 궁금해하는 이 제품은 A, B, C의 요건을 충족해야 해요. 우리는 그걸 충족하고 있어요. A는 어떻게, B는 어떻게, C는 어떻게 충족했어요.'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A, B, C의 이야기로도 다소 예시가 어렵다면 대충 이런 거다. "금융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방법으로 본인 인증을 해야 합니다. 여태까지 공인인증서 밖에 안되었는데 이제 공동 인증서 외에도 다른 방법도 가능해졌죠. 저희 솔루션은 그 인증 방식(PASS)을 모두 구현해놓았습니다." (예시로 생각나는 대로 작성한 거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팩트는 따로 확인 필요합니다.ㅎㅎㅎ)

 

여기서 포인트는 '규제 준수'라는 사실을 정리하는 건 좋지만 그 이상의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도 되고, 그냥 다 싸잡아서 '우린 다 준수해!'라고 말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준수했겠지, 기본 아냐?'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렇게 치면 우리가 쇼핑몰에서 사는 수많은 물건들이 왜 자기가 무슨 인증을 받았는지를 나열하는 것일까? 당연한 것을 했기 때문이다. 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례를 정리해도 목적이 무엇인지, 강조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고민해서 정리해야 한다. '구글 사례에 대해서 정리해보세요'라는 업무를 받았을 때 당신은 전체 보고서가 무엇에 관련된 내용인지, 그래서 구글의 무엇에 대한 사례가 필요한 건지,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일하는 방식인지, 채용 방식인지, 비용인지, 근무지인지 등 말이다. PPT 1장에는 많은 것을 넣을 수가 없다. 그러니 필요한 내용만 강조해서 정리해야만 한다.


 

 

선배가 PPT를 여러 장 만들 동안 후배에게 1장을 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여러 장을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단순한 장표라고 쉽게 만들어서 대충 끝내기보다는 그 한 장을 잘 만들기 위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보고서 전체의 목적이 무엇인지, 내가 맡은 장표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메시지를 이 장표 한 장에 담아야 하는 것인지 등 말이다. 

 

메시지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한 장의 장표가 취할 수 있는 내용의 구조와 형태는 또 다양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지부터 잘 잡아야 한다. 고스트 덱(Ghost Deck)이 그 역할을 해주는 편이긴 한데 (고스트 덱이 없다면 선배의 말...) 그거에 따라 어떤 장표를 만들지를 결정하는 것은 작성자의 몫이다.

 

고스트 덱이 뭔지 모른다면, 지난 포스팅 참고하자.

2020.04.21 - [슈르의 오피스라이프/PPT 보고서 작성 방법] - 보고서 고스트 덱(Ghost Deck)을 만들자

 

보고서 고스트 덱(Ghost Deck)을 만들자

목차도 준비가 되었고, PPT 템플릿도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는 고스트 덱(Ghost Deck)을 만들 차례다. Ghost Pack, Ghost Deck, Shell Deck, Skeleton Deck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이 PPT 장표의 묶음은 보고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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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T 1장을 맡은 이상 목적을 생각하자.

 

"장표야, 너는 장차 나가서 우리 회사 솔루션을 파는 데에 기여를 하거라"

"장표야, 너는 완성이 되면 이 사업을 하는 우리의 당위성을 증명하는 데에 너의 역할을 다 하거라"

 

이런 목적 말이다.

 

"장표야, 넌 그냥 쟤 옆에 있어. 그게 네 역할이야" 이런 거 말고... 그런 장표는 삭제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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