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어제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협력업체의 현장대리인이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어제 우리 팀 대리가 전달한 요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도 같이 이야기를 한 것이냐 물어서 '그렇다'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셨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개발) 범위에서 계속 늘어서 힘들어요"

 

매일 야근하고 주말 출근을 불사하며 개발 일정을 맞추고 있다고 그랬다. 같은 건물에서 개발을 하고 있지 않았고,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에 그런 상황인줄 전혀 몰랐다. 몇 주전에 물었을 때('야근하고 계신가요?' '주말에 출근하면서 일정 맞추고 계신가요?')는 그런 상황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그랬었고,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알려달라고 했었다. 그 '알림'을 이제 준 것이었다.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우리팀 대리가 전달한 요건에 대해 내가 인지하고 대답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전달했는지를 내가 보지 못해서 통화가 끝나자마자 제대로 읽어보았다. 후배가 무슨 일이냐 물어서 이러저러한 상황이라 확인해보고 있다고 하자 그 후배는 내가 그 내용을 읽는 걸 조심스럽게 관찰하더니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전달했나요?'라는 질문을 하더니 '아니요, 맞아요'라는 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본색을 드러낸 결정적인 질문을 했다.

 

"요구사항 명세서에 적혀 있던 부분이니 더 늘어난 것은 아니지 않나요?"


사원/대리급 후배들을 데리고 일하다가 내가 크게 실망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건 '갑이면 그래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들이 나쁜 갑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그들이 일을 못해서도 아니고, '갑이라서 그랬다'라고 이해해버린 것이다. '내가 갑이면 나도 그래야지'라고 을로서 일하면서 배웠다고나 할까. 어째서 그렇게 꼬인 심사를 갖고 컸는지 모르겠다.

 

사실 후배의 문제도 아니다. "업체가 일정이 지연된다고 전화가 왔어요."라는 날의 말에 선배들 5명 중 3명은 "지체상금(지연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보상) 내라고 해봐요"라고 했고, 1명은 "돈 더 못 준다고 말해요"라고 말했고, 그리고 마지막 1명은 "그래서요?"라고 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과 제시했으면 하는 대응방안은 "계약 변경은 못하지만 현실적 일정을 다시 잡아야하지 않을까요"였다. PM인 나 혼자 그렇게 이야기했고, 다행히 모두의 동의를 받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내가 착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이거라는 듯이다.)

 

결국 을은 자기가 갑이 되는 순간 자기들이 당한 걸 갚느라 급급하다. 그러면 안된다. 오히려 '아, 이래서 내가 을이었을 때 이런 상황이었던 거구나(수행사가 개발하느라 고생하는 걸 알기 어려운 상황)', '아, 내가 욕했던 그 상황을 내가 똑같이 하는 거였구나 (요건 늦게 전달하기)' 이런 걸 배우면 되는 거였다. 근데 후배는 그런 걸 생각도 못한 채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종이 쪼가리를 찾고 있었다. '요구사항 명세서에 써뒀으니 늘어난 건 아니지 않나요' 라니...


요구사항 명세서라는 걸 써주는 고객이 있으면 감사한 것은 사실이다. 요구사항 명세서라는 걸 받지도 못하고 일한 적이 허다하다. 요구사항을 정리해줄 능력도 없는 고객을 모시고 일하느라 내가 요구사항 정의서를 처음부터 다 쓰고 발표하고 설명하고 의견을 구하고 하나도 빠진 게 없다고 합의를 받고 회의록으로 그걸 봉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그게 구축 프로젝트의 '수행사' PL이 목숨 걸고 했던 일이었다. 그래야 일이 더 늘어나지 않을 수 있게 막을 수 있었다. 더 늘어날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최대한 찾아내야 했다. 막을 수 없는 요건은 언제나 발생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설령 늘어나도 사과라도 받고, 사정하는 갑을 마주하면서 요건을 수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배에게 묻고 싶다. '차세대 시스템을 만들어주세요' 라고 요구사항이 온다고 했을 때 너는 그걸 요구사항이 다 있는 거라고 대답할 수 있냐고. 아마 이 아이는 '우리는 그것보다 더 자세하게 써서 주지 않았나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내가 또 물을 것이다. '어디까지 자세하게 써야 충분하다 생각할 거냐고. 너에게 충분한 게 그들에게 정말 충분한 거냐'라고 말이다. 


후배는 사실 그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나름 요구사항명세서라는 것도 써줬고, 그 세부까지 일일이 다 써주지 않았을 뿐인데 이게 전화를 하면서 컴플레인을 할 일인지 말이다. 그래서 답을 알려줬다. 우리가 잘못한 점이 무엇이었고, 어떻게 하면 같은 요건을 전달해도 이런 전화를 안 받아도 되었는지를 말이다.

 

"모든 요건은 분석/설계 기간에 다 전달이 되어야 해요. 요구사항은 요구사항정의서가 완료되는 시점에, 세부 내용은 설계 단계에 다 나와야 해요. 그때 이걸 전달했다면 이런 전화는 안 왔을 거예요. 개발 막바지에 전달했기 때문에, 설령 그들이 요건을 달라고 요청해서 우리가 준거였어도 더 일찍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거예요"


좋은 갑이 되는 방법과 좋은 을이 되는 방법은 같다. 계약서가 있다면 계약서에 맞게 일하고, 합의한 일정이 있다면 일정에 맞게 일하면 되는 것이다. 요구사항을 정리해야 한다면 기한 안에 다 전달하는 게 갑이 할 일이고, 최대한 다 확인해서 정리하는 게 을이 할 일이다. 누가 말했니 안 했니 갖고 싸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명시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당연히 포함되는 거 아닌가요?(feat. 갑)'이라는 소리도, '요구사항에 전달해주지 않으셨잖아요(feat. 을)'도 다 부질없는 소리다. 이 주장을 반박해서 싸우자면 양쪽 어느 쪽에 서서 다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어느 소리를 해도 감정이 상하지 않고 잘 정리되긴 힘들다. '갑이니 내가 이기겠지', '을이니 내가 져줘야지' 이런 문제도 아니다.

 

좋은 갑이 되고 싶다면 책임을 져야 할 때,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때 내가 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된다. 정확히는 내가 갑이라는 걸 인지하는 게 아니라 그게 내 역할임을 인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을이라는 사람들, 즉 의사결정에 맞춰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줄 것이다.

 

능력 있는 수행사는 좋은 발주사를 따라간다. 내가 갑이라면 좋은 발주사가 되고, 내가 을이라면 능력있는 수행사가 되도록 하자.

 

2021.12.08 22:36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