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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를 데리고 일하다 보면 '개발'이 아닌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개발자라면 다 경험해봤을 것이고, 개발자를 데리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상황을 봤을 것이다. 이때 시대와 상관없이 언제나 생기는 일이 있는데 그건 '나는 개발자인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해?'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내미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MZ의 특성이 아님)

입만 내밀면 다행이다. 일하면서 투덜거린다. 말도 안 되는 결과물을 가져오고 '전 개발자라 이거밖에 못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일을 시킨 사람에게 '전 개발자니 개발이 하고 싶어요. 이 일은 하기 싫어요'라고 말한다. 팀장에게 면담 요청을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전 팀을 옮길게요'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개발자가 아닌 내가) 들으면 놀라울 따름이다. 누군가는 입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운이 좋아서(?) 쭉 개발만 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입사하자마자 개발을 못할 수도 있고, 입사해서 쭉 개발만 하다가 관리자로 역할이 바뀔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완전 다른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그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고 잠시 다른 일을 하기도 하는데 연차가 낮을수록 이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큰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런 후배들을 볼 때 가끔 업무 배정에 대해 어떤 점이 마음에 걸리냐고 묻곤 하는데 다음의 경우들의 대답들이 온다.

1. 전 개발자로 취직했는데 개발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거요.
2. (개발을 하게 되어도) 전 프론트 개발은 못하는데 프론트 개발을 해야 하는 거요.
3. (개발을 하게 되어도 + 백엔드 개발자에게 백엔드를 줘도) 이번에 개발하는 게 올드한 기술이라서요.
4. 한 번 (개발이 아닌) 이 일을 하면 앞으로 계속할까 봐요.

여기서 1~3의 경우는 겉으로는 달래면서 오죽했으면 그렇게 배정했겠냐, 다음에는 맞게 배정해달라고 요청해보자.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각 경우에 대해 난 다음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1~3. 정신 차려라

회사가 개발자로 뽑았다고 '사업 관리'가 하기 싫다고 하는 경우를 가장 많이 본다. 제안서나 산출물 작업하라고 하면 인상 찌푸리고 기회만 되면 불평하는 걸 본다. 자기는 PPT를 못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말 진심으로 이야기해주고 싶다.

사업관리를 오죽하면 너를 시키냐고 말이다. 개발자라서 사업관리가 싫다면, 네가 생각하는 사업관리로서 적합한 사람이 원래 어떤 역할로 취직했는지 아냐고 말이다. 그리고 도대체 왜 사업관리를 무시하냐고 말이다.

나도 PM과 사업관리 업무를 병행하라고 했을 때 뒷걸음질 친 적이 있었다. PM은 그렇다고 쳐도 사업관리는 못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내가 거절했던 이유는 나한테 사업관리가 하는 일이 가치가 낮은 일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하루아침에 훌륭한 사업관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요청을 팀장님이 받아주셔서 내가 하루아침에 해낼 수 없는 부분을 지원해주는 전문 사업관리를 붙여주셨다.

개발자라서 PPT를 못한다? 개발자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개발자라서 PPT를 못해도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너라는 직원이 PPT를 못하는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건 네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부족해서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연차가 낮을 때, 가장 기대하는 게 적을 때, 실수해도 모두가 이해해줄 때 그때 하면서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나도 PPT를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장표 1장을 나눠주면 그 1장을 갖고 하루를 다 보내도 못해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빈 장표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몰라서 스트레스라는 스트레스는 다 받아가면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모두가 PPT를 잘한다고 말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것도 10년의 9시-18시 근무도 아닌 월화수목금금금의 세월, 매일 저녁 10시의 야근 세월이 걸렸다. 나도 처음엔 장표를 들고 갔을 때 멘토가 "아, 대학생 때 PPT 안 했다고 했었지?"라고 하면서 대차게 까였던 사람이었다. 시간이, 일을 피하지 않고 노력해온 그 고민의 흔적이 나를 발전시켰다. 그뿐이다.


4. 걱정하지 말아요. 잠시 쉬어가도 커리어가 끊기지 않아요.

이 고민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 이해가 된다. 우리 회사 들어오겠다고 공부 열심히 하고, 학점 관리하고, 인턴도 하고, 별에 별 활동을 다 하고, 스터디 그룹에 면접까지 연습했다는 것을 안다. 들어오고 나면 그렇게 대단한 회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래도 자기의 인생, 커리어를 관리하는 습관과 마음가짐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물론 단기간 내에 이직을 하겠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젠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입사하던 시절에 I자형 인재가 중요하던 시절에서 T자형 인재가 중요한 시절로 바뀌었었다. 한 가지를 잘하는 인재에서 자기 전문 분야를 잘하지만 다른 것도 두루 아는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IT로 치면 백엔드만 잘하면 되는 거였다면 이제는 프론트도 잘 아는 백엔드 개발자가 더 매력적이다... 뭐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형 인재'라는 것은 내가 입사한 이후로도 계속 바뀌었다. 사실 지금은 뭔지도 모른다.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이게 앞으로도 계속 바뀔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영역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갖는다면 내려놓아도 된다.

그리고 잠시 다른 일을 하면 한걸음 물러서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개발자로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기획자로서 한 번 보게 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마다하는 게 맞을까?
개발자로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사업관리로서, PM으로서 보게 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피하는 게 맞을까?
한 번 하면 그 커리어로 굳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봐? 그 잠시의 커리어가 나에게 마이너스가 될까 봐?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이직한 사람들이 넘쳐나던 시기에 그 사람들의 커리어를 돌이켜보면, 신기술을 가장 먼저 접하고 이것저것 많이 해본 사람들이었다 (길어야 1년).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경력이 그들의 이직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는 뜻이었다. 과거에 무엇을 했든, 클라우드/인공지능을 해봤다는 이유로 많이들 데려갔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커리어 업무를 계속 고집해서 갈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요즘 나에게 종종 들어오는 포지션의 업무 설명을 보면, '좀 심한데?'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건 '두루두루 다 해본 사람을 원해요'라는 느낌의 자리인 경우다. PM/PL도 해보고~ 손익관리도 해보고~ 기획도 해보고~ Comm. 능력도 좋아야 하고~ 뭐 이런 식이다. 그리고는 맨 마지막에 특정 언어나 솔루션을 언급하면서 '이것도 다뤄본 경험도 있고~' 하는 그런 경우다. 이런 경우라면 한 가지 커리어만 고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짧더라도 두루두루 다 해봤다면 길진 않아도 다 해봤다고 할 수 있고, 나머진 아는 척으로 커버할 수 있다. (그래도 우기는 건 권장하진 않음)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결론은, 어차피 흘러가는 강 위에 있는 배에 올라탔다면 잠시 그 흐름에 나를 맡겨도 된다는 것이다. 24~26살에 회사 들어와서 정년까지 일하면 40년은 더 일하는 것인데 몇 개월의 업무가 나의 기분을 좌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잠시 다른 일을 한다고 인생이 망가지지 않는다. 어차피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다 결혼하고 애 낳고 육아 휴직하느라 쉬어버리고, 애 키운다고 다른 업무를 찾아가곤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대학원을 갈 수도 있고)

나도 입사해서 쭉 금융만 하다가 제조 프로젝트에 배정받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그 프로젝트에 배정받았던 이유는 '내 동기가 가기 싫다고 해서'였다. 그때 내가 들었던 생각은 '난 금융인데! 제조를 가면 내 커리어는 어떻게?'도 아니었고, '거기 갔다가 다시는 금융을 못하면 어떡하지!?'도 아니었다. 나는 '오, 난 금융인데 이때 아니면 제조 언제 구경해보겠어!'였다. 물론 가서 엄청 많이 울고, 괴로워하게 된 프로젝트였지만. 난 그 프로젝트를 끝내고 금융으로 무사히 복귀를 했고 다시 지금까지 금융을 해오고 있다. 그리고 덤으로 제조 인더스트리를 담당하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금융보다 제조가 더 힘들어!'라고 으스대면 '저도 제조 프로젝트해봤어요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깨갱했다. 왜? 자긴 금융을 안 해봤으니까.

어떤 상황이 나에게 올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 하나의 상황이 나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상황 하나에 스트레스받느니, 그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생각하고 이용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경험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어떤 경험이든 다 나를 키우는 자양분임을 잊지 말자. 오히려 배움이 없는 반복적인 상황을 두려워하자. 그거야 말로 커리어에도,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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