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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자그마한 고해성사를 하면서 시작하자면, 이런 내용의 책인지 모르고 샀다. '이런 내용'이 뭐냐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다소 어려운데... 내가 기대했던 책은 '조금 더 과학기술 집약적인' 책이었다고나 할까. 김초엽이라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나는 그러했다.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샀기 때문에(이건 알고 있었음) 그런 내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SF 작가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해 왔던 내용들 말이다. 하지만 웬걸... 나의 예상은 아주 크게 빗나갔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었습니다) 느낀 소회를 정리하자면, 일단 감정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라고 할 수 있겠다. 예민한 주제를, 예민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탐험하듯이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느 쪽도 될 수 있음을 감안한 김초엽과 명확하게 한쪽이라고 생각하는 김원영 두 작가의 글을 읽으며, 둘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주제를 다르게 써 내려간 모습을 보며, 그러면서 동일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그 밖에서 이걸 지켜본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을 조직이 나뉜다면 나는 아닌 사람에 속한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의 어려움을 생각해 본 사람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전자에 속한다. 나는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었다. 집에서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편하게 돌아다녔으나 밖에서는 휠체어에 올라앉아야 했다. 그 휠체어를 미는 나는 평소라면 다녔을 길을 걷지 못했고, 평소라면 넘어갔을 장애물을 넘지 못했다. 개인으로 치면 나의 힘이 약했고, 요령이 부족했고,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해 주기에 정보가 부족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그 시선을 온전히 다 떠안아야 했다. 휠체어에 오른 사람을 향한 시선에 어떠한 동정이나 안타까움, 호기심이 담기지 않도록 나는 그 휠체어를 밀면서 웃었다. 즐겁다는 듯이,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듯이, 그 현실이 나는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그래서 그랬다기보다 그래야 휠체어에 앉은 나의 가족도 나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달까... 사회는, 시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달까.

 

이 책은 그런 삶을 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사이보그가 등장한다. 먼 미래에 그 장애라는 존재를 '극복'한 존재 또는 도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언제나 비장애인인 나의 편협한 사고를 꿰뚫어 보면서 이 둘은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 장애가 없어지는 게 장애인에게 좋은 거라 생각하나요?'라고 말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익숙함을 빼앗아가는 일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알았지만, 장애라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거라 생각했기에 당연히 장애라는 것이 없어지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휠체어에서 벗어나서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식당에 들어가서 의자를 치워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좁은 통로를 요리조리 들어갈 수 있다면, 붐비는 엘리베이터나 지하철에 눈치를 보지 않고 탈 수 있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몰랐다. 왜 그들을 바꾸려고 했을까. 그들이 그런 요청을 하지 않도록, 그런 불편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비대면의 생활이 편하고, 글자에서 영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넘어가면서 그게 무조건적으로 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글자를 읽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듣는 게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게 저음성 난청이 찾아왔을 때, 새에 관한 책을 읽으며 들을 수 있는 음역대/주파수가 다르다는 걸 알고 신기해할 때에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음악을 들으며 매일 출퇴근하면서 청력이 점점 나빠져서 이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불안해 했으면서 1 아니면 0으로 들리거나 안들리거나를 생각 했지 특정 소리가 안 들려서 힘들 거라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단순히 '관심사'의 변화라고 하면서 훅훅 생활이 변해갈 때 우리가 놓치고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는 걸까. 


책 중간에 나왔던 이야기 중에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중에 하나로 처음부터 설계해서 만들어야지 나중에 추가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이 있었다. IT시스템을 개발할 때도 처음에 설계하면 쉬운 것을 나중에 추가하려면 괴로운데 사람이 생활하는 환경은 오죽할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간과해서 모르는 것이라면 speak up 해서 알려줘야 한다는 이야기... 환경을 위해 빨대를 없애면 빨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힘들다는 이야기. 그래서 가이드를 만들어서 알려주고, 미리미리 반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

 

나는 Inclusive 한 디자인을 좋아한다. UI/UX에는 취약한 사람이지만, 프로세스 설계는 스스로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보통은 어떤 신규 서비스를 만들면 나는 회원가입부터 내가 맡은 서비스 범위의 프로세스는 촘촘하게 설계하는 편이다. 예외처리에 대해서, 무한루프에 빠질 수 있는 경우에 대해서, 불편으로 인한 좌절감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사용자가 남녀노소 가능하고, 외국인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한다. 심지어 고객사 고객사다 보니 접근성에 대한 고려 역시 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김초엽이 김원영의 삶을 깊이 고려하지 못했듯이 김원영이 김초엽의 삶을 흥미롭게 쳐다봤듯이 나는 그렇게까지 바라보지 못했다.(물론 내가 만든 시스템이 김초엽이나 김원영 둘 다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미안했다. 장애인 가족의 고통을 알았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해서, 생각하지 못해서. 변화와 상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해서. 먼 미래의 기술이 모든 것을 낫게 해 줄 거라는 희망을 가졌을 뿐 당장 현실을 어떻게 포용해줘야 할지 고민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책 마지막에 가서는 글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고민과 그거에 대한 답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았기 때문이다. 이 두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그 가까운 미래가 영화 'Zootopia(주토피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고민, 고려사항, 경험을 주토피아의 장면들에 빗대어보느라 그들의 이야기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SF 소설을 읽은 게 아니었는데 나의 머리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주디가 주토피아 시티에 처음 등장한 장면을 떠올렸다. 모든 동물들의 몸의 크기, 적합한 환경, 편의성(?), 그 모든 것들이 제공되는 도시에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 햄스터가 자기에게 맞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쥐들이 자기에게 맞는 입구로 따로 백화점에 들어가서 쇼핑하는 모습. 그런 환경이 사람에게 제공될 수 있다면,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에게 맞게 제공될 수 있다면 그게 이 책에서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 덕분에 알았다. 내가 주토피아를 영화관에서 볼 때 그 장면을 주디의 시선을 따라 보면서 왜 그렇게 경이로워했는지를 말이다. 왜 감동을 받았는지 말이다. 그 웅장함도 그래픽도 아니었다. 그 모든 존재를 다 포용하는 세계관을 담아낸 그 시티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진 사회, 그런 환경. 그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디즈니가 좋았다. 나도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어서 지금도 머릿속에 그 장면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우리도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좋겠다. 

 

 

♪ BGM : Dominic Fike – Hey Blondie

2023.08.14 22.23

읽은 날 :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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