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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아니었다면 밀리의 서재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출간 전의 도서를 읽기 위해 밀리의 서재 서비스 이용을 시작했다.

 

왜 이 책이었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김초엽이라는 소설가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SF 영화도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하는 편이라 이것저것 정말 많이 봤는데 김초엽 소설가처럼 세상을 설계하고 이야기에 접근하는 사람을 찾기는 정말 힘들었다. 그 이유인즉슨, 보통 SF 영화나 소설을 보면 "잘 봐, 내가 상상하는 미래는 이런 모습이야. 어때? 내 상상력 대박이지?"라는 느낌인데 김초엽은 그 게임에서는 뒤로 물러서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요, 이런 걸 한 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고나 할까. 워낙 작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해서 옆에 앉아서 유심히 들어야 하는, 그런 매력이 있다.

 

내가 SF를 보는 이유는 누군가의 상상력에 자극을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상상력을 보면서 '와, 미래는 이럴 수도 있겠구나'의 생각을 하진 않는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면서 '와 저런 미래가 올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특이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냥 누군가의 상상을 보면서 흥미로워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SF보다는 판타지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고나 할까. '내 미래는 아니고, 좋은 상상이다'하는 흐뭇함...?

 

나는 미래의 기술 발전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은 편이다. 옛날 영화가 미래라고 설계한 년도를 보면 아톰은 2003년생이다. 터미네이터의 경우 2029년 미래에서 온다. 하지만 그 2003년을 지나오고 2029년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는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아얘 3000년이라고 하면 몰라도...) 그래서 화려한 상상력에는 동하지 않는다. 갈수록 과학적 정확성에 기반한 소설들이 나오는데 그마저도 나를 너무 피곤하게 할 뿐이다. (판타지 원츄!)

 

그런 포화상태의 SF 세계에서 김초엽은 그야말로 구원 같았다. (그래도 천선란 다음...) 현재의 세계를 그대로 베이스로 깔고 엄청나게 작은 미래의 요소 하나를 던져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는 상상력에 대한 자랑보단 미래와의 교감이 있다. 그녀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경우는 단편을 엮어서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빠르게 나왔다. 장편에서는 어떠했을지 궁금했는데,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코로나 19에서 영향을 받은 소설이라고 하면 믿을 것 같다. 들이마셔서는 안 되는 공기가 존재한다면, 그게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퍼져서 발생한 거라면, 이름만 다를 뿐 이건 코로나 19였다. 그리고 이야기 속 현재는 그 모든 사단이 지나간 이후다. 모든 것이 과거의 재앙이라고 이야기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그 시대 말이다. 우리로 치면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총을 겨누며 전쟁을 했으리라는 걸 믿지 못하는 세대의 아이들이 태어나 역사로서 과거를 배우면서 크는 그런 시대 말이다.

 

(우리의 현재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미래에 사는 주인공은 (우리의 미래일 것 같은 모습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무엇하나 미래 같지 않은데 누가 봐도 지금 우리의 디스토피아로서의 미래였다. 개인이 살기 위해 개인이 되기를 선택하는 곳의 모습이었다. 자식을 팔고서라도 살겠다는 부모, 나보다 (유전적으로) 우월한 사람의 희생으로 살겠다는 절대 다수가 사는 세상. 그런 극단적인 미래에서 이 소설가는 사람과 사람도 아니고 기계와 기계도 아닌 기계와 사람, 그것도 딱 둘 만의 세계에 집중을 하기로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 둘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라서다. 

 

과학적 설명을 주지 않는다, 유사한 개념도 어려운 단어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일상의 용어로 이야기하는 이 소설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도 아닌 기계 하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심지어 기계 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계속 진행해간다. 마치 사과를 깎아 먹는데 껍질을 한 번에 깎아내기 위해 둥글게 둥글게 돌돌돌 깎는 그런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껍질이 깎여 나가는 걸 알면서도 사과 중심까지 가고 싶어서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가까워지는 기분. 근데 그게 답답하거나 조바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고나 할까. 적당한 반전, 적당한 숨김,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 좋은 소설이었다. 각각의 캐릭터도 분명했고 좋았다. 각자가 다 자기만의 이유로 좋았다.

 

누군가가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추천하는 소설이라고 하겠다. 이 세상이 어떠한 이유로 생명이 다 죽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살기 위해 사람이 서로를 짓밟고 밀쳐내며 싸우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세상 어딘가에도 온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걸 김초엽이 '온실'이라는 존재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세계로 짧은 기간이나마 여행할 수 있었던 것 만으로 난 행운이었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먼저 가기 위해서 밀리의 서재를 선택한 것뿐이다. 다른 사람들도 시간이 되면 이 여행을 해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이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파란 도깨비불을 보며 의자에 앉아서 흐뭇하게 웃는 한 노인의 미소를 만나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추억이, 약속이, 각오가 한 사람의 평생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특별한 대화나 여행이 없이도 단순한 느낌과 인연만으로, 어쩌면 호기심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런 일생의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면, 읽게 된 나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까.

 

나에게도 그런 일생의 이야기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나의 평생을 좌우할 그런 이야기. 그런 내 이야기를 알기 위해 누군가가 끊임없이 달려준다면 그것도 그거대로 고마운 일 아닐까.

 

2021.05.26 22:14

 

읽은 날 : 202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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