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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간단히 '문과생'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엄밀히는 이학 학위를 받았다. '이학 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스스로가 '문과생'이라고 하기엔 엄청난 양의 수학을 기초로 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학만 놓고 보면 대학교에서 수학 부전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배웠고(선형대수를 만나고 수학을 포기했다), 컴퓨터공학 영역에서는 프로그래밍 수업도 들은 경험이 있다(그게 파이썬이었다는 게 대박사건). 

 

그래서 전공이 무엇이냐면, '경제학'이다. 보편적으로 '금융'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수학을 빡세게 해야 하고, 세상을 극단적인 가정을 깔고서 분석하는, 엄청난, 초, 초, 초특급, 순수 학문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내가 IT회사를 들어갔으니, 다른 컴퓨터공학 전공의 신입사원과는 차원이 다른 무지함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경제학 전공이기 때문)에 내가 IT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내 전공 때문이 아니었다. 누구는 회사를 전공에 맞춰서 지원하고, 누구는 희망 연봉에 맞춰서 지원하고, 누구는 안정성을 보고 지원하는 등등의 유형인데 난 이마저도 아니었다. 그냥 IT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기가 좋았다. 젊었고, 문화가 좋아 보였고, 공동의 적(고객)이 있어서 내부 싸움이 적어 보였다. 첫 번째 직장이 워낙 올드하고 보수적인 데다가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고 있어서 IT회사가 마냥 좋아 보였다. 거기다가 내가 은근히 학자 스타일이었기에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그 생태계가 좋아 보였다. (인공지능이라는 게 들어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런 IT회사를 들어간다는 것이 비전공자인 나에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1년 차에 일을 열심히 배워서 따라가도 2년 차엔 다른 새로운 일을 했고, 매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트렌드가 나를 괴롭혔다. 빅데이터가 핫했을 때에는 빅데이터 과제를 피해 다녔고, AI/인공지능이 나왔을 때는 야심 차게 도전했다가 너무 힘들어서 인공지능을 마음속으로 거부해버리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해도 일이 내 앞에서 치워지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다 함)

 

그렇게 빅데이터 프로젝트를 거치고, 텍스트 분석 프로젝트를을 거치고, 인공지능을 거치고 겨우 프로젝트를 피해서 온 곳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클라우드와 보안이었다. 클라우드 위에 개발할 서비스에 대해서 신나게 설계를 다 했더니 정보보안팀에서 '개인정보를 취급하시는군요. 그럼 해당 보안을 준수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며 엑셀 파일 하나를 던져줬다.

 

"?????????????"

"웹방화벽? DDos? 서버접근제어? 전송구간 암호화?"

 

처음 보는 엑셀 파일의 내용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인프라 담당자도 보안 담당자도 없이 나 혼자 PM, PL, 화면 설계, 테이블 설계를 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보안이었다. 몰랐다. 검색을 해도 모르겠고, 아는 사람에게 물어도 다들 잘 모른다고 했다. 항상 고객사의 시스템을 구축해주는 SI회사에서는 보안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다루는 분야였다. 고객사 정보보안팀이 보안솔루션과 보안 기준을 다 정해서 진행했기 때문에 이 영역에 대해서는 외부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주를 날렸다(그 사이에 휴가+다른 업무에 끌려가서 버린 날짜까지 하면 4주...). 보안 엑셀 파일 대응 하나를 못해서, 멍 때리다가 시간만 날렸다. (이랬는데 월급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진도 안 나가고 있는 걸 보며 대판 깨지고 (Zoom으로 혼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정신 차리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은 팀장을 제외하고 2명이다. 나(슈 과장)까지 총 3명. 내 위의 부장님은 "전 보안 몰라요."하고 나한테 던져버렸고, 내 밑에 대리는 "제가 뭘 해야 하죠?"라고 멀뚱멀뚱 있었다. 모두 재택근무하고 있는 상황에서 회의실에 사람을 모아도 Zoom에서는 멍 때리고 있는 사람들만 보였고, 진도는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다들 하는 소리는 "이건 아키텍트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였다. 그렇게 말한다고 주지도 않을 아키텍트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엔 나는 더 혼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가 움직이기로 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도 없었다. 나는 모르는 걸 묻는걸 창피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물어보면서 돌아오는 상대방의 태도가 나에게 마상을 남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모른다고 손 놓고 있다가 영원히 모르고 일이 끝나는 게 더 창피했다. 연차가 쌓이면서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들이 나의 연차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연차가 조금이라도 적을 때, 지켜야 할 것들이 조금이라도 적을 때, 상대방의 기대치가 조금이라도 적을 때 더 부지런히 묻기로 했다.

 

아는 사람에게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 내용을 알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이라도 달라고 말이다. 묻는 건 내가 할 테니 연결만 해주면 나머진 내가 하겠노라 했다. 그러고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그 조언을 듣고 내용을 채우고, 공부를 해서 정보보안팀에 들고 갔다. 전화해서 엑셀 한 줄 한 줄을 다 설명을 들었다. 엑셀을 고치고 다시 보내고 다시 통화하고 그 과정을 4-5번을 반복했다. 솔루션을 바꾸라고 조언해주면 그렇게 하고, 견적을 다시 받으라고 하면 다시 받아서 다시 예산을 짰다. 통화 내용을 녹음했다가 다시 듣고 메모장에 다시 정리했다. 그렇게 정보보안, 클라우드, 인프라의 아는 사람과 알게 된 사람을 모두 괴롭혀가면서 혼난 지 1주일 만에 정보보안팀에게서 보안조치 계획 및 예산에 대해 합격을 받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많이 했던 일은 하나였다. "죄송해요. 제가 보안은 전혀 몰라서요. AWS 기능을 잘 몰라서요." 그러고 설명해달라고 했다. AWS 기능은 무료인지 유료인지, 뭐가 필요한지, 이 기능에 더 고려해야 하는 게 있는지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연결되는 사람마다 동일한 질문을 다 했다. 몰랐던 내용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더 좋은 방법이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나와 통화하며 시달리는 사람이 원래 그 업무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감사 인사를 드렸고, 업무와 무관한데 지인 찬스로 도와주신 분에게는 감사 인사와 기프티콘을 자그마한 보답으로 보내드렸다. 


이 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이 물어봤다가 헛웃음을 짓게 한 대답도 많이 했다.

 

"PM이 누구예요?" / "저요"

"인프라 담당자 있지 않아요?" / "없어요. 제가 챙겨요"

"아키텍트 없나요?" / "없어요. 못 구해서 제가 하고 있어요."

"나중에 클라우드 구성 누가 해요?" / "지원 못 받으면 저희가 해야죠."

 

이런 막무가내의 대답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황당해하고 많이들 불쌍한 마음에 도와주셨다. 같은 회사 사람들이었기에 망정이지 고객사였으면 클레임 들어왔을 거다. (사실은 고객사에서도 다른 업무로 이렇게 했는데, 내가 불쌍했는지 무심하기로 유명한 고객이 직접 챙겨주셨다.)


포스팅 제목은 저러한데 웃긴 건 IT에서는 누구도 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만 해도 '보안'을 아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서 온 사방에 수소문을 했으니, 나 같은 상황에 놓이는 건 순식간이라는 뜻이다. 그게 보안이 될 수도 있고, ERD 작성일 수도 있고 (그렇다. 나는 전에 ERD라는 단어를 처음 들고 또 물어물어 ERD를 그렸다), 화면 설계서일 수도 있고(네, 저 와이어프레임도 그리고 Figma도 쓸 줄 알아요),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냐'이다. "전문가(인프라 아키텍트, AA, DA, DBA, 디자이너 등)가 필요해요, 난 몰라요, 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할 것인지 "물어서 어떻게든 해보자"를 할지의 문제 말이다. 물론, 당연히, 요구해서 전문가를 구할 수 있다면 구하는 게 맞다. 그게 효율적이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방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구할 확률이 낮거나, 일정이 촉박하다면 누군가 움직여야 한다. 물어서 하든 검색해서 하든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 모든 걸 다 배웠어도 보안 담당자보다, 인프라 아키텍트보다, 디자이너보다, DBA보다 전문가가 되진 못한다. 하지만 내가 PM이고 PL일 때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했고 제대로 했는지는 알 수가 있다. 이 모든 경험이 나의 재산이 된다고 생각하고 발로 뛰었다. 전화를 돌리고 사정하고 구걸하고 부탁하고 '나는 바보예요~'라고 염치없는 소리를 하면서까지 결과를 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몰라서 한심해하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보다 손 놓고 멍 때리고 있었다고 혼나는 게 더 자존심이 상해서 움직였다.


만약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꼭 도전하길 바란다. 일이 앞으로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쟤는 맡기면 어떻게든 진도를 빼는 애야', '쟤는 그래도 끝내 해내는 애야'라는 평이 따라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산출물은 회사 것이어도, 경험은 내 것이다. 그리고 회사가 전문가를 대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데 ('인프라 아키텍트 한 명 채용하자'), 처음해보는 일을 해내는 사람을 구하고 키우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다.

 

* 물론, 또 뭐 새로 던져주고 해 보라고 하면... 나도 책상을 한 번 엎을 것 같다. ^^ 이번에 너무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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