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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때의 일이다. 인턴 첫날 현장 답사 과제를 받았다. 조원들과 같이 답사를 하고 제 3자로서 느낀 그 회사의 장단점을 정리해서 발표하는 일이었다. 불행히도 우리는 과제를 준 회사와 달리 그 현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못 들어갔다는 우리의 말에 '너네는 들어갈 줄 알았다. 해낼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피드백을 들었는데... 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래서 우리는 현장의 장단점을 발표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생각해낸 방법은 '아이디어'였다. 앞으로 미래에는 어떤 걸 하면 좋겠다는 발표하기로 했다.

 

아이디어는 나누어서 의견을 냈고 그 의견들이 모여서 프랑켄슈타인이 되었다. 내 의견도 일부 있었는데, 그건 앞으로 지어지는 아파트에는 스마트 그리드가 들어갔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집안을 컨트롤하는 스마트 그리드가 아닌, 우리 아파트의 다른 집은 전력을 얼마나 쓰는지, 언제 쓰는지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는 걸 하자고 했다. 그게 확대가 되면 아파트 단위로 볼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경쟁심리가 생겨서 전력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발표는 동기가 했다. 내가 설명해준 걸 토대로 발표를 했고, 내용은 정확하게 발표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 발표에 대해 챌린지가 들어왔을 때 그 동기는 '아, 네'라고만 대답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챌린지는 "실제로 그런 사례는 없다."였다. 나는 그 발표가 다 끝나고 동기들한테 내가 가서 실제로 있다고 말씀드리고 오겠다고 했다. 떠나는 임원들을 쫓아가려고 하는 나를 동기들이 일제히 잡으며 막았다.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라고 하면서...


이 일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정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하는 용기가 매력적이라는 듯이 강조하던 광고도 예전에 있었다. 사람들이 길을 잘못 가고 있으면 그걸 알려줘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멈출 수 있는 용기'라는 표현도 쓴다. 멈추지 못해서 돌이키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리스크 관리 교육에서도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소신 발언'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 양, 매력적인 것인 양, 그렇게 인지하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

 

위의 일화를 보면 소신 발언을 하려고 한 나만 옳은 사람이고 나를 말린 동기들은 묻어가는 사람들이었을까? 힘에 굴복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모두가 다른 가치관이 있어서 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지금 나보고 그 시간에 다시 가면 다르게 행동했을 거냐고 묻는다면 난 아마도 애초에 나가서 말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침묵하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점심을 먹다가 팀장님한테서 전화가 와서 무심코 받았다. 당장 오늘까지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여태 진도가 안 나가서 긴급지원을 해주라는 이야기였다. 당장 오늘까지 만들어야 하는 자료를 지원하는 일이야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놀랍지 않았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짐을 주섬주섬 싸서 갔다. (물론 가는 내내 씩씩댄 건 안 비밀이다. 노트북을 짊어지고 가는데 1시간 반이 걸렸으니...)

 

문제는 도착한 후였다. 진행되었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셨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아무 문제가 없는 내용이라는 듯이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전 그런 내용을 보고서로 쓸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황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 둘 나타났고 이유를 물었다. 나의 이유는 그게 허위보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쓸 수 없다고 했다. 당장 지금 보고를 막기 위해 그런 말을 쓰면 다음을 수습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3시간을 그 대안을 마련하는 데에 시간을 다 날려버렸다.

 

결국 우리가 내린 결론은 "못한다고 보고한다"였다. 소신 있는 사람들이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등장한 팀장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팀장님은 그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간파하시고는 나를 쳐다보면서 말씀하셨다.

 

"안되길 바래서 그렇게 말한 거지?"

 

그리고는 결국 팀장님의 강력한 의지로 우리는 보고서를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정리하기로 했다. 내가 허위라고 말했던 부분의 용어를 바꾸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는 방향으로 수정하는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그걸 들으면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후배가 나한테 옆에서 들었다면서 나를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 이 일로 깨달은 점이 있었다. 매번 보고서 작업 막바지에 나를 불렀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부르면 의견이 너무 강해서 위에서 원하는 보고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마지막 날에 부르면 시간이 없어서 만들어달라는 대로 만들어주니 더 편했던 것이다. 같은 팀 차장님이 그랬다.

 

"슈 과장은, 내부적으로 일은 잘하는데 까다로워서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평이 있어."

 

그제야 알았다. 모두를 위해 했던 소신발언에서 나만 손해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항상 내가 '안된다'라고 외치는 사람이었고,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었고, '전 그렇게 보고서를 쓸 수 없어요', '허위보고는 할 수 없어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SI 프로젝트에서 PL로서는 바람직한 성향이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그런 상황을 눈감고 있지 못하는 성격일 뿐이다. 나중에 곤란하지 않기 위해 소위 총대를 메는 성격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결국은 나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하게 되었다.

 

소신 발언은 좋지만, 눈치껏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려고 한다. 보고하는 사람이 원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원칙을 언젠가부터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이제는 다시 그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 소신 발언을 해봤자, 두더지 게임에서 머리 내미는 두더지 꼴밖에 안된다는 것을 이번에 실감했다. 

 

이 회사에 들어와서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걸 10년 차에 잃어버린 것 같아서 다소 우울하다.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 포스팅을 읽는 사람들도, 눈치와 소신발언의 중간점을 잘 찾기를 바란다. 그게 어디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이 다소 어렵지만, 쉽게 말해보자면... 상대방의 직책이 높을수록 소신발언의 양을 줄이고, 눈치를 올리면 된다. ^^ 반비례 그래프를 생각하면 될까. 강자 앞에서 강하고 약자 앞에서 약한 스타일이 좋다지만, 아무래도 회사는 그러면 안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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