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지는 모르겠는데 살다 보면 한국 사람인 나보다 외국 사람이 나보다 한국말을 정확하게 하는 걸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라거나 '나보다 더 한국 사람 같다'라고 생각하면서 멍해지곤 한다. 《헤어질 결심》, 이 영화가 딱 나한테 그랬다.

 

단순한 이야기, 뻔한 것 같은 내용의 영화... 줄거리만 듣고 가면 다 스포일 당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영화를 보면 그 무엇도 스포일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엄청난 기대를 하고 가지만 《기생충》을 봤을 때만큼의 충격도 받지 못하는 영화다. 찝찝한 기분이 들 거라고 막연하게 마음속으로 경계심을 품고 영화관에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그 무엇도 없다. 그냥,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다. 세상 어느 곳엔가 존재할 것 같지만,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이야기...


보편적인 형사의 모습과는 다른 남자 주인공. 그리고 전형적인 이과생 여자인 남자 주인공의 부인. 감성적인 그에게 수치와 횟수 같은 정량적인 지표를 꺼내는 아내는 상반된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이 나타났을 때 이 남자는 그냥 끌렸나 보다. 그 외의 이유로는 왜 이 여자에게 마음을 뺏겼는지는 알기가 다소 어렵다. 근데 그마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둘 간의 대화였다.

 

남자 주인공이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내는 질문에 여자 주인공은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을 한다. 감정적인 내용은 통역기(중국어 -> 한국어)를 통해 전달해서 모든 감정을 죽여버리고, 감정이 폭발해야 할 것 같은 대사들은 한국말로 절제된 감정을 통해서 말한다.

 

제일 좋아했던 장면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남편 사망 사건을 두 번 연속으로 담당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라고 말하는데 여자 주인공이 조용한 목소리로 "공교롭다고 하겠죠"라고 말했던 장면, 그리고 두 번째 남편마저 나쁜 남자를 만나서 또다시 매 맞는 여자가 되어버린 여자 주인공에게 그럴 거면 왜 결혼했냐고 화를 내는데 여자 주인공이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는 형사가 조사하면 할수록 나오는 모든 진실을 같이 따라가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자기가 그렇게 만만하냐 화내는 남자에게 자기가 그렇게 나쁘냐 되묻는 여자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나는 결국 나의 대답을 정했다. 

 

"당신은 정말 나쁩니다."

 

수많은 인생의 경로에서 그 길 밖에 선택하지 못해서, 그 모든 감정을 다 죽이고 누구의 행복도 찾아주지 못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 남자를 위한 것이어서, 남은 사랑을 짊어져야 하는 남자가 안쓰러워서 그렇게 정했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다고 대답하긴 어려웠지만, 몰입해서 봤다. 무엇을 나에게 전달하기 위해 만든 영화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묻는다면 꼭 한 번은 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가 사랑받는다면 저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누군가가 사랑을 한다면 저렇게 할 수도 있다고 알 수 있는 영화라고. 이 모든 게 단순히 언젠가 헤어지기 위해 하는 일들이라면 그 행동의 크기만큼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난 이런 사랑을 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남자의 외투에 있는 12개의 주머니에서 본인의 손을 닦기 위해 물티슈를 꺼내는 여자가 있을 때, 남자의 입술을 챙겨주기 위해 립밤을 꺼내는 여자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남자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 알 수가 있다.

 

2022.07.05 23:42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