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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보고 온 《한산》에 이어서 《노량》을 보고 왔다. 이번에는 《한산》과는 이순신 장군을 만나고 왔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다 다르다고 생각했던, 국적도, 언어도 다른 3개의 집단이 같은 이유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순신 장군이 준사에게 묻는다. '고향에 가고 싶지 않냐'라고. 그 말에 준사는 대답한다. '전쟁이 끝나야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모든 군사가 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겠노라 대답을 하고 방에서 나간다. 그 뒷모습을 이순신 장군은 묵묵히 바라본다.

 

처음 그 대사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는 '아 사망 플래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깔아놓은 복선을 맞춰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영화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영화가 절정으로 갈수록 머릿속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명나라 사람도 다 한 가지 이유로 전쟁에 임했다. '집에 가기 위해서.'이 얼마나 단순한 동기인가 싶을 정도로,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귀소본능' 하나로 저 전쟁에 임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에게 왜 이렇게까지 싸우고 싶어 하냐고 수차례 묻는 진린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죽어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같은 의문을 가지고 이순신 장군을 바라봤다. 고집스러운 저 얼굴로, 명쾌한 답을 주지 않고, 돌려서 신념 같은 말만을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답은 마지막에 이순신 장군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 돌아갈 집이 거기였구나.'

 

《노량》에서의 이순신 장군은 이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곳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야 집으로 갈 수 있다는 3개국의 군사들과 달리, 그는 전쟁이 끝나면 집이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런 걱정을 담은 편지를 읽고 이순신 장군이 그 자리에서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불태워 없애버리는 이유는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모두 전쟁 이후를 생각한다면서 괴로워하는 그 말에는 그런 의도가 있었을 것이었다.

 

전쟁 이후에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건 그가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전쟁이 있어야 본인의 자리가 있는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영화 나폴레옹이 생각난 것은 그러한 이유였던 것 같다.) 그보단 전쟁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서 돌아갈 집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잃은 것을 더 잃지 않기 위해 전쟁터에 남았으리라 생각한다.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들이 꿈에 찾아왔다고 할 때 이순신 장군의 부인이 이야기한다. "죽어서도 아빠만 찾나 봅니다. 나한테도 와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이순신 장군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꿈을 같이 꾼 우리는 안다.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고 싶어 했던 집은 그 아들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항상 그 집에 찾아가고 항상 그 아들을 꿈꾸는 이순신 장군을 보며 누구는 '그래도 아빠였구나'라는 마음을 느꼈겠지만, 나는 그보다 '아 그는 그때 돌아갈 집을 잃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치르며 잃었던 수많은 전우를 떠올리며 그들을 회상하고, 그들과 같이 싸우는 장면을 보며 누군가는 전쟁의 흐름을 끊었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평온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전쟁 중에도 긴장을 놓지 않았던 그 얼굴이 그 장면에서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살아 외롭게 이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는지를 생각했다.


SI 프로젝트를 하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프로젝트를 잘해야 시간이 되면 집에 갈 수 있다'라고 말이다. 매일 칼퇴해서 집에 일찍 가기 위해서,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집으로 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 다 같이 힘내서 일하자고 독려를 한다. 그런 농담 같은 말을 들으면서 소속이 어디든 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프로젝트 팀원들을 본다.

 

시대가 지나도, 상황이 달라져도 우리는 결국 그런 존재들인 것 같다. 돌아갈 집을 지키기 위해 밖에서 싸우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싸움을 끝낸다. 놀랍게도 연봉도, 인정도, 그 어떤 보상도, 이보다 더 강력한 동기부여를 해주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약 기간 안에 프로젝트를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표가 손 닿을 거리에 있다. 조금 더 노력하면, 우린 모두 집에 갈 수 있다. 결국 SI란게 이런 거 아니던가.


《노량》이라는 영화가 그런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 만든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강렬한 2시간 반 동안 집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영화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전우들의 곁으로, 준사는 결국 바다로 돌아갔다.

 

집에 가지 못하고 길을 잃은 영혼이 없기를 바라며, 영화 《노량》의 감상문을 마친다.

 

2024.01.09 22:20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의 감상이 궁금하다면 아래 글 참고하세요.

2024.01.14 - [슈르의 영화 라이프] - 우리는 삶의 의미를 위해 싸운다,《한산: 용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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