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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연히 발견했다.

 

'114 상담사의 마음 청취법'이라는 부제를 보고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이 전화를 하고, 그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하는지 말이다. 개인적으로 한 번도 114에 전화해본 경험이 없어서 (심지어 SKT는 114를 전화하면 T114로 연결을 한다) 어떤 세상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렇게 책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이 책은 개인적으로 만나서 너무 반갑고 고마운 책이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을 때는 보지 못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저자를 실제로 보고 싶어서 영상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책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저자 김연진 상담사님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내가 아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웃으면서 '맞아 맞아'하면서 다시 봤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마치면서 나는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세상의, 내가 몰랐던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갖게 되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하는 일 중 하나는 콜센터의 업무 일부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는 일이다. 그렇다. 김연진 상담사님이 하는 일의 일부, 그녀가 반복적으로 하는 일을 기계가 대체하게 함으로써 사람이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이 일을 했다. 그렇게 누군가를 설득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공감해줄 거라고 믿었다. 왜냐, 상담사라는 업무는 감정 노동직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공지능이 상담사를 대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난 호탕하게 웃으면서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인공지능이 상담사의 일을 대체하는 상황이 올까 봐 불안하다는 내용이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한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들의 운명이 그러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전체 내용 중에서 이 부분만큼은 내가 상담사님에게 '걱정 말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발언이고 상담사들의 일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 이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114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많은 일들을 한다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책을 읽기 전의 나처럼 '우리는 알아서 검색을 잘하니까 전화하지 않아도 돼', '그런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라고들 말했다. 안타까웠다. 이들이 하는 일이 '전화번호 안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마치 '시리야, 전화번호 알려줘'라고 물으면 오는 대답인 것처럼... 하지만 이들은 그 이상이었다.


내가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던 이유는 전화번호를 안내해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진상을 부려도 웃으며 대응해주는 프로페셔널함이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24x365 서비스를 제공해주기 때문도 아니었다. 김연진 상담사가 20년 동안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우리나라 지명에 대해 빠삭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 언제든, 용건이 무엇이든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개인의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계산적으로 변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순하면 경시하고, 적정 수준의 복잡함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면서 '개인 대 개인이 단순했던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런 복잡한 사회에서,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대면/비대면의 무한한 인간관계 속에서 누군가는 외롭고 누군가는 고립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률이 1위라고 하는 나라에 살면서 그건 교육이나 성공에 대한 압력 때문이라고 믿으면서 살았다. 무엇에도 상위의 10%가 되지 못하지만 하위 10%에도 들지 않은 딱 중간에 있는 스스로를 칭찬하며 이게 살기 편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한국은 그런 나라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면서 인공지능이라는 놈을 팔았다. 상위 10%와 하위 10%를 고려해주지 않는 그런 절대다수를 위한 시스템을 말이다. 그리고는 100%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뻔뻔했다.

 

코로나든 뭐든 정책을 펴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나 나만 들여다보았다. 내가 손해를 보나, 나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말이다. 절대다수에 들어가는 나에게 맞으면 나는 문제가 없다고 넘겼다. 누군가에겐 문제가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넘겼다.

 

그렇게 내가 지나쳐버리고 나만 생각할 때 114 상담사님들은 내가 지나쳐버린 사람들을 챙겼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 인터넷에 검색할 키워드를 모르는 경우), 어디다 물어봐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연락해야 할 보험사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뭔가 고장 났는데 누굴 불러야 할지 모를 때) 등 인공지능이라면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라고 할만한 질문들을 받아주고 답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들어주었다. 자기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전화에 노래를 들어주고 점수를 매겨주고,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응원을 하고, 고립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었다. 가끔은 자신의 영역이 아님에도 나서서 개입을 해주었다. 이건 인공지능을 매일 같이, 몇 년을 고도화해도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건 둘째치고 그러기 위한 인공지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절대다수를 위해 그려놓은 길을 내가 편하게 걸어가고 있을 때, 평범한 일반인이었기에 생각 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때, 상담사님들은 어쩌다 보니 그 길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끌어주고 밀어주며. 쌓여있는 소외감 박탈감이 분노가 되어 잘못된 사람에게 향했을 때에도 '직업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웃으면서 대응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놓치고 지나쳐버린 것들이 채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이 길이 아닌 그 길을 갔더라면 어땠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 장소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만난 덕분에 더 좋은 길로 갔을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상담사 한 명이 하루에 1500 콜을 받으신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은 하루에 1,500명을 좋은 길로 안내해준 것 아닌가. 혼자였던 사람에게 잠시나마 둘이 될 기회를 준 것 아닌가. 사실 사회는, 세상은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닌가.

 

감사한 마음이다. 언젠가 114에 전화를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의 말버릇 같은 감사하다는 단어에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20년을 한 자리를 지켜온 김연진 상담사님을 보며 나의 직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저도 잘할게요. 상담사님처럼 20년은 못 지킬지 모르지만, 저도 누군가 찾았을 때 닿을 수 있는 위치에서, 때로는 잠시나마 혼자가 아닌 둘이 될 수 있게. 저도 누군가에게 '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2022.07.2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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