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I를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고객을 만나게 된다. 다양한 역할, 상황, 위치 등 을의 입장으로 갑을 만나더라도 다양한 관계로 만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관계가 정립되기도 한다. 실제로 나한텐 나이스 했던 고객이 우리 회사 다른 사람에겐 매정한 경우도 봤고, 사이가 엄청 나빴던 고객인데 시간이 지나서 협력업체 직원으로 병의 입장으로 다시 만난 경우도 있다(이건 우리 팀 분의 이야기인데, 난 갑자기 나타나 살갑게 인사하며 사라지는 사람을 보고 '저 친절한 분은 누구세요?'라고 생각 없이 물어보다가 우연히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응 원래 다른 프로젝트 갑이었어.')

 

그래서 내 경력이 그렇게 길진 않지만, 차세대도 뛰고, 세일즈도 따라가고, 컨설팅도 하고, 업체도 만나고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는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이, 외모, 성별로 인하여 첫인상에서 엄청나게 마이너스를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방에 대한 견적을 빠르고 정확하게 내리는 편이다. 

 

그런 나의 판단의 결과를 요약해 보면 다른 사람보다는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적을 쉽게 만들지 않고, 상대방의 장단을 정확하게 알고 장점을 좋아하고 단점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누군가 여우면 여우라 좋아하고 누군가 곰이면 곰이라 좋아한다. 여우라 좋고 곰이라 싫고 하는 논리는 내 사전에 없다.

 

이런 판단을 우리 회사 사람들로 비추어보면 대체로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과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 둘로 나뉠 뿐 그 이상의 분류는 없다. 아주 드물게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도 등장하는데 그런 경우는 보통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경우다. 고집이 세고, 성격이 세거나, 욕이 심한 사람들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상대방을 사람으로 안 보고 갑/을/병으로 구분하거나 지위/직책으로 구분하고 대하는 경우를 말한다. 내가 후배라 나한테 하대하는 사람보다는 협력업체 직원에게 선을 넘은 짓을 시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다. 

 

같은 논리로 갑을 평가할 때 나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을이 된 입장에서, 내가 을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는 갑사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금융 고객을 만나면 금융 고객도 참 다양한 갑이 나타나는데, 이번 계기로, 특별히 싫었던 고객이 없었던 내 SI 회사 경험에 블랙리스트에 등극한 고객이 등장했다.

 

얼핏 들으면 여러 명이 있고 그중에 1위에 등극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유일하다. 내가 만난 고객을 통틀어서, 미팅이든, 수행이든, 뭐든 다 해서 내가 제일 싫어하고 제일 미워하고 제일 만나기 싫어하는 한 사람이 생겼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도대체 어떻길래 그런지 궁금하시죠? 이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나의 '블랙 고객'의 성격들!

 

 

1. 내가 갑이야. 난 그래서 갑질을 해도 돼! - 갑질을 즐기는 타입

 

이 고객은 쉽게 말해서 자기가 갑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취해있었다. '언제 식사하시죠'라는 말은 '밥을 사라'라는 뜻이고, '지금은 예산을 마련할 수 없어요'라는 말은 '공짜로 해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항상 이렇게 돌려서 읊조리는 스타일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당신 A사는 어차피 이거 하면 도움 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하실 거잖아요. 그걸 지금 하면 된다는 거예요'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갑질에 넘어가서 을인 우리가 그가 원하는 걸 해주면 활짝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하고 넙죽 받아간다. 

 

심지어 나한테는 다른 업체에게 어떤 갑질을 했는지 말하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면 나한테도 그럴 거라고 생각 못할까 봐?)

 

 

2. 내가 둘리로 보이니? 니들이 오냐오냐 하니까 군기가 빠졌구나? - 군기 잡는 타입

 

이게 사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부분이다. 난 일관성 있는 갑을 좋아한다. 그냥 빡세게 일 시키고 요구하는 고객이 좋고, 열심히 일하면 격려의 빈말을 던져주는 갑이 좋다. 근데 이 사람은 군기를 잡았다가, 잘해줬다가, 우리가 만만하게 기어오르는 것 같으면(기어오른 적이 없다) 예고도 없이 윽박지르고 화내고 모욕을 줬다. (그러곤 자기는 좋은 사람이란다.)

 

갑 : "이거 문제 있다고 이야기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안 해요? 제가 만만해요?"

나 : "아니요... 문제 있는 걸 서로 이야기해서 알고 있고 조치하면 됩니다"'

갑 : "지금 조치 못 하고 계시잖아요!"

 

이런 대화를 했었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농담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담아놓았던 한 맺힌 구박을 다 쏟아내는 성격이었다. 

 

더 환장하는 건, 이걸 오후 4시에 해놓고 저녁 10시에 야근하는 내 자리로 와서 자기가 고생한 하루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다시 살갑게 굴었다는 것이다.

 

 

3. 제가 몇 명의 PM을 교체했는지 아세요? - 갑질의 라떼 타입

 

개인적으로 자기 커리어 자랑하는 고객은 수도 없이 만나서 익숙하다.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고객도 있고, 성공사례만 모아서 이야기한 고객도 있고, 자기네 CEO에게 상 받은 이야기, 문제 프로젝트 수습한 영웅담 등등 정말 많이 만났다. 그럼 신기해하며 존중의 눈빛을 보내며 박수를 쳐드리면 되는 일이었다. (사이가 좋아지는 지름길이다.) 근데 이 분은 그렇지 않았다.

 

프로젝트 들어가자마자 겪었던 일이다. 야근을 위해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는 고객 PM이 와서 합석을 하셨다. 그러고 밥 먹으면서 '오늘 야근하시나요?'라는 돌려서 흡족한 갑의 멘트를 하시면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가 선택한 주제는 "제가 몇 명의 PM을 교체했는지 아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탐탁치 않다는 말을 돌려서 말하며, 내가 일을 제대로 못하면 여태 그래왔듯이 PM을 교체하겠다는 협박을 들으며 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어떤 시그널인지 알아채지 못한 우리 PL을 바라보며 나는 대화에 맞장구치며 "SI에선 그런 일이 많죠. 하하하"라고 해야 했다. 그리고는 매우 흡족해하는 고객에게 인사를 하고 야근을 하러 가야 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야근을 해야 했을까.

 

 

4. 야근하고 있지? 너네가 나보다 더 일해야지 - 감시자 타입

 

FM대로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하도를 준(턴키) 업체의 근태를 감독하는 건 하도급법 위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턴키 계약에 MM가 산정되어 들어가기 때문에 그걸 열심히 챙기는 고객도 있고, 고객이 직접 챙기지 않아도 회사 시스템에서 사원증 태그 또는 사내 시스템 로그인 시간으로 자동으로 관리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법은 법이고 이건 이거다 하면서 진행하는 곳들을 심심찮게 보는데, 관리를 위해 정당화하자면 성립되는 논리가 있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해 버린다. (어차피 9시에 와서 야근하니까...)

 

우리 고객님은 집과 사이트의 거리가 먼 나를 측은하게 여겨 "9시에 땡 하고 오지 않아도 돼요"라고 초특급 자상하게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그거에 속을 내가 아니지. 9시까지 사무실에 도착해서 다시 나가서 모닝커피를 사들고 들어오곤 했었는데, 마주치면 너무나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사악한 미소로 "지금 출근하는 건 아니죠?"라는 의심에 가득 찬 관리자형 질문을 던지곤 했었다. "가방이 없잖아요. ^^ 커피만 사들고 올라가는 길입니다."라고 대답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근무 층이 달랐는데 (근무공간 분리도 원칙이다. 층까진 아니지만..) 고객님은 꼭 퇴근길에 내 자리에 들렀다가 가셨다. 저녁 10시에 내 자리에 깜짝 출현했는데 내가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으면 다음 날 나에게 천사였다. 만사 OK. 다 통과. 근데 조금이라도 한가해 보이고, 해이한 것 같으면, 또 불러다가 군기를 잡곤 했다. (프로젝트 중에 고객이 찾아왔을 때 내가 자리에 없었던 건 1번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쓰면 '에이, 이걸로? 더 한 고객도 많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참고로 나도 술자리에서 고객사 임원 술 따라주라고 해서 H라인 치마 입고 좌식 식당에서 다리 쥐 나도록 쭈그리고 앉아서 술 따라드리며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까르르하며 박수 쳐드린 적도 있다. (남자 약 20명에 여자 1명이었음)

 

근데 여기가 왜 블랙 고객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런 사람들이라서'다. 그렇다고 나한테 손을 댄 것도 아니고, 멘트를 잘못 날려서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우리 고객님들은 또 양반이라. 생각이 저급해도 말은 양반 같이 한다.)

 

저 고객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가 갑이라는 이유로 그 권력을 휘두르는 걸 즐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PM으로서의 능력이 상당이 부족한 데에 비해 요구하는 건 대책 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가 일일이 이야기해줘야 해요? 수행사가 해야 하는 건데 왜 제가 일일이 이야기해야 해요? 당연히 하셔야죠'라고 말해서 작업을 해서 갖다 주면 항상 의견이 없다. '리뷰 부탁드립니다' 했을 때 내가 받은 리뷰는 '특별히 의견이 없습니다' 거나 '이 내용도 추가해 주세요'였다. 그 내용도 심지어 자기가 만든 게 아니었다. ^^

 

거지 심리로. 이번 기회에 자기 숙제를 한 방에 해결해 보자는 심보(남의 비용으로). 쥐꼬리만 한 프로젝트에 그 금액을 훨씬 넘어서는 요구사항을 주고도 미안함이든 고마움이든 없는 사람.

 

난 돈 많은 고객을 좋아한다. 거지 같이 저런 거 하나하나 궁색하게 굴지 않는 고객. '이 사업이 100억짜리인데 왜 그게 안 돼요!?'라고 소리칠지언정 '(1억 사업인데) 이거 좀 더 해주면 안 돼요?' 하는 궁색함이 싫다.

 

 

그렇다. 난 100억짜리 사업 예산을 받아올 능력이 없어서 1억짜리 사업을 만들어서 생색내는 고객이 딱 질색이다.

 

무능한 고객이 딱 질색이란 말이다!

 

2024.07.30 23:39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