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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PM 4개월 차, 이 스타트업과 일한 지 4개월이 되어간다. 지난 포스팅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르는 사이에 대차게 망쳐놓은 사업구조를 고객사의 요청에 건져 올려서 겨우 수습해서 끌고 나가고 있었다. 나보다 더 유능한 PM들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고 한편으로는 한심하게 끌고 나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고객 PM도 부족함을 이해해 주는 모드였고, 스타트업 직원들도 자신들의 성장이 되는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와 주고 있었다. 

 

지난 포스팅 내용이 궁금하다면 참고하기 바란다.

2023.11.20 - [슈르의 오피스라이프/슈르의 오피스 이야기] - 스타트업이 SI를 망치는 과정

 

스타트업이 SI를 망치는 과정

SI업계에 변화가 생겼다면 그건 스타트업의 등장일 것 같다. 여태 SI 업계에 SI만 판치던 상태에서, 끽해야 SI 빠삭한 솔루션 업체가 조심스럽게 발을 딛이는 수준이었던 업계에서, '스타트업'이라

ebongshurr.tistory.com

 

여튼, 적어도 우리끼리는 화목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이 부족한 직원들을 데리고 일하면서 그래도 가르쳐주는 보람이 있었다고나 할까. 리뷰를 해주는 선배가 없다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의지하고, 힘이 된다는 말을 하는 이 직원들을 보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업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시시콜콜해주면 이런 이야기를 또 어디서 들을 수 있냐고, 꼰대나 라떼 이야기라고 안 하고 너무나도 즐겁게 들어줘서 이야기하는 나까지 즐거웠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우리 프로젝트 범위 밖에서 안일하게 대처한 일로 인하여 비수로 나의 뒤통수에 꽂혀버렸다. 그리고 그 상처와 배신감이 너무 커서 나는 그 화를 삭히는 데에 며칠이 걸렸다.


얼마 전, 고객이 다른 회사의 프로젝트에 이 스타트업이 입찰의향서를 제출했다고 알려줬다.

 

"응? 우리 없이? 단독으로?"

 

이 수많은 의문에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다른 회사를 끼지 않고 단독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어떻게? 제안을 무슨 수로 하려고?"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다른 회사랑 같이 손잡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렇게 된거 응원을 해주기로 했다. 스타트업은 건수가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성장지표로 인정이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제안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회사 사장이랑 통화까지 했다.

 

그렇게 제안서 제출일은 다가왔고, 설명회 날이 되었다.

 

호기심 반, 의문 반으로 직원에게 제출한 제안서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떤지 한 번 보고 의견을 달라며 나에게 보여줬다. 그렇게 핸드폰으로 열어준 제안서의 파일을 넘기면서 나는 얼굴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그 스타트 업이 지금 내가 프로젝트 PM으로 수행하고 있는 제안서를 카피해서 안에 내용은 고객사 이름, 프로젝트명 등 단어만 바꿔서 다른 고객사 제안서로 제출했다.

 

"(한장 넘기고) 제 장표네요, (한장 넘기고) 제 장표네요, (한장 넘기고) 제 장표네요, (한장 넘기고) 제 장표네요,...., 다 내가 쓴 거네...? 이 장표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장표를 넘기는 나에게 그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사해서 남의 제안서에 들어가 버린 내 장표를 보는 나의 분노에 찬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배신당했다. 우리회사의 자산을 도용한 것은 둘째 치고, 지금 우리와의 계약관계가 있는 상황인데도 용감하게 내 눈 밑에서 이런 짓을 했다. 우리 회사를, 나를, 우리 영업을, 고객을, 어디까지, 얼마나 무시한 걸까 싶어서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법무팀에 연락해서 법적으로 대응을 해야 하는 건지, 팀장님에게 일러야 하는 건지, 고객사에 이야기해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장표 한 장을 쓰기 위해서 하루에 겨우 한 장 만들어가며, 새벽까지 작업하지 않았던가. 그걸 어떻게 이렇게 양심없이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 화를 삭였다...


자료를 보여준 직원이 곤란한 상황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지금 일이 힘든데 더 복잡한 일을 만들어서 불려 다니기도 싫었다. 그래서 담아두기로 했다.

 

"지금 전,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수주하면 우리가 그 제안서를 구해서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땐 저도 막아줄 수 없어요. 알겠죠? 수주 못하기를 기도하세요. 그게 당신 회사가 사는 길이에요."

 

"네..."


개인적으로 이렇게 뒤통수를 맞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스타트업이 SI회사가 하는 일을 무시해서 자기들이 단독으로 진행하다가 실패한 건 여럿 봤지만, 그걸 해내 보이겠다고 남의 제안서를 100% 카피해서 대응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3개월 동안 이 업체를 믿기로 한 결정을 철회했다. 그 회사의 성장을 위해 최대한 도와줬던 그 모든 것들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젠 믿지 않기로 했다.

 

다시는 내가 정성 들여서 빚은 나의 작품들이, 어디에서 변형되어서 못생긴 모습으로 팔려나가는 걸 보기 싫다. 스팀보트 윌리 미키 마우스의 저작권이 풀려서 돌아다니는 걸 바라보는 월트 디즈니의 마음이 이런 거겠지.

 

2024.02.0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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