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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업계에 변화가 생겼다면 그건 스타트업의 등장일 것 같다. 여태 SI 업계에 SI만 판치던 상태에서, 끽해야 SI 빠삭한 솔루션 업체가 조심스럽게 발을 딛이는 수준이었던 업계에서, '스타트업'이라는 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엄청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근데 그 변화가 좋지만은 않다. 이 업체들 때문에 참 많은 것들이 어그러지는 것을 본다. 놀랍게도 그 어그러짐의 끝에는 SI업체가 대체 불가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래서 SI는 없어지지 않겠구나...' 하는 그런 역설적인 깨달음.? 이 결론은 SI업체도, 고객사도 느낀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팽팽한 갑을의 관계가 돈독한 협력관계가 되어버린다.

 

스타트업이 SI를 망치는 과정을 설명해 주겠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솔루션 스타트업이 있다면 제발 유심히 읽고 이 시장에 끼어들기를 바란다. 


우선, 컨셉과 기술만 믿고 덤비는 순수하고 열정만 넘치는 업체들이 자신의 기술을 홍보한다. 대기업/금융사/공기업의 벤처/창업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키움을 당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IR 자료도 만들고 데모도 만들고 엄청나게 많은 발표와 설명회를 거친다. 대표나 영업대표 중심으로 홍보를 거치면서 여러 곳에서 테스트를 요청하고 PoC도 하고 작게나마 솔루션 계약을 하기도 한다. 고객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데모를 보고, 설명을 듣고 혹해서 '오, 훌륭한 솔루션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랑 같이 사업하자'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고는 콧대가 아주 높아진 상태에서 '본사업'이라는 걸 만나게 된다.

 

이 스타트업들은 이때까지도 자신이 어디에 발을 들인 건지 깨닫지 못한다. 허술한 고객사 프로젝트 몇 개 PoC 했다고 사례라고 들고 와서는 '저도 프로젝트 수행할 줄 알아요'라고 콧대를 세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본다. 주로 한참 어리고, 학력은 좋은 아이들이 야심 차게 기술을 마구마구 읊어대며 영업하는 것을 본다.(비하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이 그래요.)

 

이때 고객사와 이 업체는 동상이몽이 시작된다. 여우짓도 못하고, 정직한 엔지니어 영업만 해왔고, 경험이 부족해서 금액의 버퍼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업체는 고객에게 자신의 솔루션 금액이며 딜리버리 방식이며 다 오픈해 버리는 상황이 온다. '어차피 네고해서 깎을 텐데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지금 그냥 할인가를 제시하자'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고객의 '관행상 네고'가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관행상 네고'를 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객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솔루션을 도입하면 솔루션 단독으로 구성하는 시스템 환경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 이 업체하고 단독으로 계약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른 건 안 해도 자기 직원 정보라도 갖다 쓰거나, 통합로그인이라고 해야 하니 말이다. 쉽게 말하면 고객사 내부 시스템과의 연동이 필요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객은 고민을 시작한다. '얘네가 일하다가 뻗으면 어떡하지?', '얘네가 중간에 망하면 어떡하지?', '얘네가 SI 영역을 할 수 있을까?', '얘네가 우리 임원 보고를 할 수 있을까?' 등등의 오만가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RFP를 주면, 제안서를 써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까지 도달하면 고객사는 추진하던 일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리고는 전화번호부를 열어서 전화를 건다. SI업체 영업에게...

 

그렇게 SI업체에게 연락이 온다. 이런 업체가 있는데, 매우 영소하고 경험이 부족하니 너네가 데리고 들어와서 프로젝트 좀 수행해 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 업체가 솔루션은 참 좋은데 SI를 못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SI에 필요한 개발자들은 SI회사인 너네가 좀 챙겨서 들어오라고. 제안서도 너네가 좀 써달라고. 결국 고객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모든 Risk를 감수해 줄 회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SI회사가 업체를 연락하면, 그 순수함과 열정... 기술력... 을 갖고 말도 안 되는 일하는 방식으로 SI회사를 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만나자고 하면 '너무 멀다. Zoom으로 하자'라고 하면서 Zoom에서 대표인지 영업대표인지 하는 그 말 잘하는 1명이 수십 번 했을 거라 예상되는 그런 설명을 하고 나머지 찐 엔지니어로 보이는 사람들은 카메라 속에서 어딘지 모르는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설명력이 한참 부족한 영업용 제품소개서를 보여주고 설명하면서 '이거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미팅 시간을 넘기는 것을 본다. 그럼 SI회사는 그 미팅이 끝난 후에 한숨을 쉬면서 '이게 맞는 건가요?' 하면서 '실체가 있긴 한 건가?'라는 의문을 갖는 wrap up 회의를 한다.

 

그리고는 같이 사업을 만들어서 들어가야 하니 견적을 요청하면 고객사에 전달했던 그 견적이 그대로 오는 것을 본다. 고객사에 전달했던 그 금액보다 더 낮춰서 줘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깎아달라고 하면 SI회사가 갑질한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하고 괴로워하며 자신들의 솔루션이 헐값으로 팔린다고 싫어한다. 심지어는 '고객사는 우리를 좋아해. SI회사를 선정하는 제안인데 왜 우리가 가격을 깎아!?' 하면서 가격을 양보하지 않기도 한다.

 

이들은 고객에게 1억이라는 견적을 줬다면 그 금액이 '원가 + 마진'이라는 사실은 알면서 그 사이에 SI회사가 끼면 고객이 동일한 1억을 받으면 그 금액에 '원가 + 스타트업의 마진 + SI회사의 마진'이 있어야 한다는 건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 솔루션을 우리가 과일 뜯어다가 팔면서 마진을 무식하게 붙인다고 생각한다고나 할까.

 

이런 업체들과 제안을 하면 '우리는 솔루션 영역, 즉 코어만 할 거고 나머지 지저분한 영역은 당신들 R&R이에요'라고 말하는 업체들을 본다. 이 R&R이 문제라는 건 아니다. 그걸 하겠다고 SI회사가 들어가는 거니 말이다. 하지만 이 업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SI 업체는 전체 업무량이 10이라고 하면 그걸  5:5, 3:7로 나누기 위해 들어가는 2번째 업체가 아니다. SI 회사는 전체 10을 책임지고 그 안에 업체가 3이든 5든 7이든 수행할 수 있게 챙기는 역할까지 하는 거다. 그들이 SI라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헤맬 것들을 다 해결해 주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SI회사 아래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SI회사에게 그 마진을 붙이게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그걸 생각 못하고 고객사 하고 타이트한 예산으로 네고를 해와서 자기들 마진이 줄어들고 그걸 SI회사에게 탓하는 것이다.


이런 솔루션 회사들은 결국 특정 시점에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게 대부분 다 '제안서'라는 과정이다. 고객사랑 이야기할 때 대응이 되었고, PoC도 잘했고, 임원 보고도 잘해서 자신만만한 상태로 있다가 이제 본사업의 'RFP'를 받으면 자신들의 솔루션 영역에 대한 내용 외에 앞 뒤로 무지막지하게 많은 것들을 작성해야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건 못하는데...?'라고 깨닫는 것이다.

 

아는 어떤 업체는 우리랑 프로젝트할 때는 우리가 제안서를 알아서 다 쓰고 제출해서 (업체에는 견적만 받고) 그 과정이 어떤지 몰라서 프로젝트 내내 '어차피 우리가 다 개발하는 거면 SI회사가 왜 있어야 하지?'라는 용감한 생각을 하고 다른 고객사의 영업을 혼자 하다가 RFP를 보고 사업을 드랍한 걸 본 적이 있다.(업체 사람이 이야기해 줌)

 

어떤 업체는 RFP를 보고도 제안서를 엉망으로 써줘서(역시 용감하니 퀄리티 엉망인 게 당당히 온다) 우리가 다 새로 썼는데,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감이 없으니 프로젝트 수주하고 계약하고 들어와서는 내 얼굴에 대고 '전체 매출에 우리 몫은 x밖에 안되는데 나머진 누가 가져간 거예요?'라는 놀라운 멘트를 날렸다. 차마 그 자리에서 '어... 우리?'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스타트업이라면 제발 알아주길 바란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탁월한 솔루션이라고 믿어도, 그게 특정 고객사에는 한참 허술한 솔루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컨셉과 기술을 인정해 주고 나머지는 본사업에 구축하면서 SI로 다 채우기를 기대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SI를 해본 적이 없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PM으로서 말하자면, 간곡히 부탁하건대 '이 문서는 (PM인 당신이) 만들어 주셔야죠'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기를 바란다. 심하게 말해주자면... '당신들의 용감하고 순수한 산출물을 어차피 고객사에 주지 못하니 내용이라도 성의 있게 줘야 합니다.' 제발 버전 0.1 수준도 안 되는 문서를 주면서 다음날 고객에게 줘야 하는 PM 얼굴에 던져주지 말기를 바란다. 일찍 주든지, 리뷰를 요청하든지, 묻기라도 하란 말이다. 밤새서 그거 수습해서 고객에게 줘야 하는 건 결국 저니까요.

 

SI회사가 하는 일이 없고, 개발자 구해다가 노가다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스타트업이 우물 안에서 신나게 개굴개굴 할 수 있도록 PM, 사업관리, 영업, 아키텍트, 개발자 다 구성해서 데려오는 게 SI회사다. 그리고 당신들이 고객 앞에서 직접적으로 욕먹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고, 당신들이 고객 앞에서 말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만나는 자리도 최소화해 주는 게 SI회사다. 돌아다니면서 고객이랑 밥 먹고 커피 마시며 일정 갖고 쪼고 보고서 써오라고 일만 시키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당신들이 업무 빵꾸내고 산출물 엉망으로 써도 허허 웃으면서 사인받고 돈 받을 수 있게 고객 비위 맞춰주느라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께 산출물 마무리하고 주간보고 쓰느라 3년 차 후배랑 둘이 10시까지 야근하는데 후배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그 말을 듣고 평소라면 그냥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줬을 내가, 너무나도 솔직하게 '그 말을 듣는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미안하다'라고 대답했다.

 

후배가 나한테 한 말은 이거였다.

 

"제 파트가 아닌 (솔루션 영역) 일을 챙기기 위해 지금까지 일하는 이유는 그 (솔루션) 업체가 만든 산출물을 고객에게 주면 결국 우리 회사가 욕먹기 때문이에요. 우리 회사가 욕을 먹으면 제가 욕먹는 거잖아요."

 

PM인 나만 욕먹고 끝났을 텐데, 이런 산출물을 주면서 내일 고객의 얼굴을 도대체 어떻게 보냐고 괴로워하며 고개를 박은 내 한심한 모습을 보고 3년 차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이런 스타트업들을 데리고 일하는 게 처음은 아니라 난 익숙했는데, '3년 차가 이렇게 빨리 커야 했나'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인공지능 기반의 솔루션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스타트업 주도로 SI사업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본다. 너무 작은 사업으로 견적을 마음대로 줘버려서 SI회사가 제대로 사람을 구성할 구도도 못 잡고 무리하게 참여하는 모습을 본다. (사업 예산이 작으면 PM이 사업관리, 품질관리, 테스트담당자 등 역할을 다 겸직해야 함. RFP에 담당자를 지정하라고 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름은 들어가야 함)

 

전통적 SI 프로젝트가 좋다. SI 주도의 체계적인 구조가 잡힌 그런 사업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막을 수 없을 테니, 이 글을 읽는 용감하고 순수한 스타트업이 있다면, 조금 더 알고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이 글 하나 읽고 무슨 수로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SI 회사의 이런 행태를 잘 아는 사람을 채용해서라도 데리고 있기를 바란다.(SI회사 출신 개발자를 뽑으라는 게 아니다. 걔들도 모른다.) 컨셉과 기술은 사업의 발주까지는 고객을 웃게 해도, 딜리버리 역량의 부재는 고객을 분노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참고로, 똑똑한 솔루션 업체는 SI업체에 먼저 연락을 한다. '이런 사업을 어느 고객사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데, 저희가 SI 영역은 잘 못해서요. 같이 참여하실 생각 없으실까요?'라고 말이다. 그 사업이나 고객사가 충분히 매력이 있다면 SI 회사는 기꺼이 앞장서서 사업을 같이 만들고 그 업체도 챙겨준다. 그리고 그 사업을 만들면서 먼저 연락한 업체를 교체하는 일은 없다. 그 정도 상도의는 있다.

 

2023.11.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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