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슈 과장은 서비스 개발 업무를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워크샵을 진행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UX를 담당하는 부서와 회의를 했다. 슈 과장과 달리 그 부서는 트렌드에 민감한 부서였는데, UX 부서의 다양한 업무 중에 '서비스 개발 워크샵' 커리큘럼 관련해서 최종 협의할 게 있어서 만나게 되었다.
서비스 개발 워크샵을 요청한 것은 우리 부서였다. 사내에 그런 부서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원을 요청했고 그 부서도 그런 지원으로 먹고사는 부서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났다. 특별히 기대하지도 않고,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한 미팅에서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회의 초반부터 뒤로 물러나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회의를 지켜보는 자세를 취하기로 결심해버렸다. 그들은, 우리는, 너무나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IT에서 일하다 보면 특정 영역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때가 있다. 지금은 그게 '인공지능'인데... 이런 영역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 '새로운 툴'을 접하는 것이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하게 하는 느낌으로,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툴을 접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점이 분명히 있어서 사람들이 열광하고 입소문이 난 것일 테니까. 이전의 무엇인가가 불편해서 개선하다 보니 나타난 것일 테니 나쁜 것일 수가 없다. 그걸 배우고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개인의 의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걸 널리 전파하고 업무에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새로운 툴이 있어도 그것을 천천히 도입하는 것이 좋은 이유를 이야기로 하나씩 풀어보겠다.
1. 새로운 툴을 만들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 가장 초보의 수준에 맞춰지는 법이다.
새로운 툴이 있어도 회사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여러 명이서 쓴다는 뜻이다. 여러 명이 그 툴을 사용하는 법을 숙지해야 하고 그 툴을 이용해서 공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명이서 쓰면 결국 그 툴을 사용하는 걸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사용하게 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슈 과장이 신입이었을 때 업무 중에 엑셀로 데이터 정리하는 일이 있었다. 매주 데이터를 받아서 통계를 내는 것이 일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현행화된 데이터였을 뿐 결과 형식은 동일했다. 그래서 엑셀로 raw data sheet를 바꾸면 데이터가 다 현행화되도록 함수를 신나게 걸어놓았었다.
그 결과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었다. 너무나도 편하다고, 너도나도 그 파일을 달라고 연락이 왔었다. 너무나도 일관된 형식이라 매주 새로 만들어지는 엑셀 파일에 비해 신뢰가 간다고 했었다. 진작에 이렇게들 하시지 하며 어깨를 으쓱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그게 유지가 되는 이유가 그 파일을 만든 당사자인 나만이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업무를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마자, 그 엑셀 파일을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체계는 원상복구 되었다. 그 엑셀의 함수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향 평준화되는 거였다.
2. 새로운 툴은 새로운 파일 확장자를 만든다. 호환성이 깨진다는 것이다.
역시나 사원일 때의 이야기다. PPT를 예쁘게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을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발표를 할 때 고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만 고민했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것저것 방법을 찾다가 'prezi'라는 툴을 찾아냈다. 온라인으로 만들어서 동영상과 PPT를 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클릭 액션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정하는 것은 PPT와 동일했으나, 확대/축소라는 기능은 강조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웠다. 그래서 우리는 밤을 지새워가면서 낯설었지만 멋있어 보였던 그 툴을 사용해서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발표를 한 사람도 그 발표를 본 사람들도 극찬을 했다. 어떻게 그런 걸 만들었냐며(prezi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때여서) 새로워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뿌듯해하며 우리는 그 파일을 다른 발표자료들처럼 저장해두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다음에 다른 일로 그 자료를 사용하려고 해도 prezi로 만들었기 때문에 ppt로 옮겨오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던 것이다. 원래 같으면 ppt였을 테니 복사해와서 필요한 수정과 편집을 했을 텐데 prezi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ppt로 옮긴다는 것은 재작업을 뜻했다. 심지어 보면서 작업하기도 어려워서 prezi의 자료는 결국 서서히 잊혀졌다.과거의 참고 자료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린 그 자료는 결국 prezi의 매력도 떨어뜨렸다. prezi를 활용한 발표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 새로운 프로그램 또는 웹페이지는 회사의 통제를 받게 된다.
보안이 자유로운 회사에서는 낯설 수 있는 이슈다. 하지만 보안이 중요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거나,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꼭 만나게 되는 일이다.
3.1 기업용으로 사용해도 되는가?
모든 프로그램은 개인이 집에서 사용할 때는 다운이 가능하면 무료로 편하게 써버린다. '무료니까 다운 받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쉽게 쓰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용은 다르다. 심지어 알집도 기업에서 사용하려면 무료가 아니다. 회사에서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구입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런 게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일한다면 무료인 빵집 같은 대체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한다.
다행히 IT에서의 새로운 프로그램들은 기업에서도 자유롭게 쓰는 걸 허락하기도 하고, 요즘엔 다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사용할 수 있어서 그 이슈가 크게 없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 프로그램으로 제공하는 곳들이 있으니 꼭 검토를 해야 한다.
3.2 프로그램 설치가 차단될 수도 있다.
보안이 엄격한 회사에서 일한다면 SW 설치가 화이트리스트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을 확률이 높다. 화이트리스트라고 하면 허가된 프로그램 이외에는 설치가 안되도록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오피스라든지, 알집이라든지, 그 외에 몇 개를 제외하면 설치가 아예 안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싶어도 이거 때문에 안 되는 회사들도 종종 나타난다. 처음부터 설치가 안되면 애초에 작업한 게 없어서 다행인데, 제일 문제가 되는 게 외부에서 개발을 다 했는데, 보안이 강한 환경에서 반입해서 설치를 해야 하는 경우다. 그 프로그램 설치가 안되어서 이후 진행이 하나도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2 호환성 문제!) 다시 개발하는 것보다 SW 설치 허락을 받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서 진행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SW 설치 허가를 받기 위해서 온갖 신청서와 증빙서류(기업에서 사용이 가능하고 안전하다는...)를 보내야 하는데 이것도 운이 좋아야 허락을 받을 수 있다. 당연히 프로젝트라면 이거 때문에 지연이 발생하게 된다.
3.3 웹사이트가 차단될 수 있다.
프로그램 설치를 차단한다면 당연히 웹사이트도 차단할 수 있다. 웹사이트 역시 화이트리스트 기반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프로그램처럼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웹사이트를 화이트리스트로 관리하는 곳은 드물다. 인터넷이 되는 환경이라면 보통 차단되는 사이트가 몇 개 있고, 보통은 파일 업로드가 차단되는 형태로 오픈해준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을 해보면 업로드를 필요로 하게 되기도 하고 무언가가 일하는 데에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그 작업한 내용을 메일로 공유하고 싶은데 웹사이트는 외부망이고, 메일은 사내망인 경우라면 무조건 불편하다. 무. 조. 건.
자 그럼 이제 다시 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이 슈 과장에게 충격을 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한번 하는 워크샵을 위해서 UX 툴을 두 개를 추천해주었다. 하나는 UX 협업 툴 miro 였다.
엄청나게 화려해 보이고 예뻐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잘 보면 워크샵에서 포스트잇에 써서 붙이고 글씨를 쓰고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온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워크샵의 내용을 정리하고 싶다면 이 툴을 사용하라며 권했으나, 사진으로 남기거나 ppt로 그려야 하는 일에 이 툴을 왜 사용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문제 #1), PPT로 옮기는 데에 용이한 툴인 걸까?(문제 #2), 정말 더 효율적인걸까?(아주 근본적인 문제)
그 부서가 사용한다고 했으니 차단 문제는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최근에 접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 듣고 또다시 놀랐다. 전문가 부서가 이제 막 접한 툴을 하루 워크샵 하는 사람들에게 사용을 권한다는 것이 맞는 것이었을까...?
(두 번째 툴도 비슷한 문제니 생략하기로 하겠다.)
확실히 화려한 툴은 좋다. 예쁜 툴도 좋다. 하지만 회사의 일은 소수의 조별 활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모두가 만드는 자료는 회사의 자산이다. 공짜라고 좋다고 웹사이트에 쉽게 올려서 작업해도 되는 내용이 아니고, 그 상태로 웹사이트에 남겨놓아도 되는 내용도 아니다.(괜히 그런 일이 많으면 대기업이 직접 그런 툴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PPT라는 툴이 불편한 게 많고 비효율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작업할 때 활용하는 자료를 보면 10년 전 PPT도 있다. 그건 새로운 협업 툴은 줄 수가 없는 자산이다. 그리고 그렇게 20년을 일한 사람들과 일한다면 그들에게 새로운 도구를 쥐어준다는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IT여도, 변화를 두려워하면 안 되고 새로운 것을 계속 도전하는 것이 권장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재주를 배워야지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그걸 배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회의에서 내내 침묵하고 앉아있었다. "그 사람들이 이걸 언제 배워서 쓰나요?"라고 따지고 싶었다. "이 작업을 한번 해보겠다고 계정까지 새로 생성하는 것이 맞는 건가요?"라고 황당해하고 싶었다. "좋은 툴인 것 같은데, 전문 부서인 당신들이나 쓰세요."라고 선언하고 싶었다. 괜히 디지털로 다 할 수 있는 것을 포스트잇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화려함 신기함 새로움에 현혹되어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내년이면 쓰지도 않을 도구를. 그들 외에는 누구도 활용하지 않을 도구를 강요하고 있었다.
난 그런 도구를 사용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회의가 끝나자마자 걸어 나왔다.
* 참고 : '비효율의 숙달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효율의 숙달화'는 없어져야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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