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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부쩍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슈 과장은 꼰대야 꼰대. 좋게 말하면... 라떼?" 이럴 때마다 깔깔깔 웃으면서 맞다고 박수치며 동조하지만 언제나 뒤로 돌아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곤 했다. '내가 무엇을 특별히 했던가? 꼰대나 라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언가가 달랐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 답은 나에게서 찾아야 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 끝에 내가 찾은 답은 '아, 내가 FM이어서 그렇구나'였다.

 

"슈 과장님은 FM이에요."라는 말도 올해 유난히 많이 들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기 시작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황에서 파악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일하는 성격이 전부였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눈에 띄었던 것은 내가 FM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 코멘트가 나쁘게 쓰였다는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가지 못하는 빡빡함을 가진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보였던 것 같다. 유연함을 잃고, 기준과 원칙을 지키느라 효율성마저 잃어버린 그런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고 우기자면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FM이 유연함을 잃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의 정의를 하고 시작해보자. FM이 무엇일까? FM은 군대 용어에서 시작된 것 같은데(슈 과장은 군대를 다녀온 적이 없다...), Field Manual이라고 해서 매뉴얼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을 FM이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좋게 표현하면 정석대로 움직이는 교본과 같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원리 원칙대로 행동해서 융통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회사에서 FM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정해져 있지 않다. 개인의 선호를 떠나 상황에 따라 다를 뿐이다. 하지만 보편적, 대부분의 경우 FM은 원칙대로 움직인다는 뜻이지만 그게 욕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비판과 비난은 다르다.)

 

"저 사람 FM이야"라는 것은 원칙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유연한 업무처리를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로 쓰일 때가 많다. 어떠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도 없고, 빌어도 사정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참 인간미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FM인 사람들은 징계를 받거나, 일을 못한다고 욕을 먹는 경우는 없다. (원칙대로 했는데 징계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유연하지 못한 죄?) 대응이 늦어서 사업기회를 놓쳐서 후발주자가 된다던지 경쟁에서 질 수는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칙의 문제지 원칙을 따른 그 사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처리한 일로 인해 일을 요청하거나 연관된 사람이 같이 징계를 받는 일도 없다. 깔끔한 일처리의 표본들이기 때문에, 뒤탈이 없는 사람들이다.


민첩함, 애자일(Agile)이 중요하다는 이 시대에서 FM을 택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회사 다니면서 징계를 받지 않아서? 욕을 먹지 않아서? 아니다. 그건 모든 민첩함, 애자일에도 '원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FM인 사람이 애자일 하지 못한 건 아니다. FM인 사람은 깔끔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저분해질 수도 있는 유연함을 택하지 못할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자일이 되지 않는 건 그 사람이 FM이라서가 아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재밌는 현상이 있다. 시장에 변화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새로운 현상,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항상 기존의 기준을 깨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사는 생각보다 원칙이 단순해서 깨고 말고 할 기존의 기준이라는 게 딱히 없다. (있다고 하면 결재선 정도?) 그 얼마 안 되는 기준은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에 전혀 장애가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느림이, 애자일 하지 못함이 다 기존 기준에 있다고 착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 당신이 그 원칙, 기준, 매뉴얼을 처음부터 싫어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다.


자, 그럼 슈 과장은 어떻길래 FM에 손을 들어주는 걸까. 슈 과장이 생각하는 FM은 무엇이길래 꼰대나 라떼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애자일 하게 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걸까?

 

간단하다. 슈 과장이 생각하는 건 일하는 방식의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1) 나의 직급에 맞는 일을 하고, 2) 나의 상하 관계에 맞게 업무 지시를 주고/받고 일을 하고, 3) 내 의사결정자들에게 시의적절한 보고를 하고 의사결정을 받는 것, 4) 그 외 이해관계자들에게는 협의된 R&R에 맞게 일을 하고 공유를 하는 것.

 

이 정도로 왜 FM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물어볼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일할 뿐인데 FM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물론 그 외의 업무 외의 부가적인 원칙들도 있다. 5) 근태/근무 시간에 대한 엄격함, 6) 회사 법인카드 사용의 적절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읽어보면 전혀 어렵지가 않다. '그게 뭐가 어려워?' 할 정도로 쉬운 것들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원들은 이 중 무언가 하나 지키는 것이 어려워서 회사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고, 이것들을 지키지 못해서 미움을 사고, 업무에서 제외되고, 마지막으로 권고사직을 받게 된다.


당신의 머리에 일을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FM이고 하나는 편한 길이라면, FM의 방법을 선택하도록 하자. FM으로 일해서 사람들이 "와... FM이야..."라고 하지 "쟨 일을 못해"라고 하진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내 머리에 편한 길만 있다면, 안타깝게도 "쟨 일을 못해"라는 말을 들으면서 FM의 방식을 배워가도록 하자.

 

주의사항은 슈 과장처럼 정석, FM의 일처리 순서/방식이 뭔지 잔소리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럴 때는 혼난다고 생각하지 말자. 대학생 조별과제를 하는 게 아니라면, 모두가 공감하고 기대하는 일처리 방식을 준수하면서 일을 하는 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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