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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포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이 두려워서 개봉일에 영화를 보고 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을 여러 개 보았는데, 특별히 팬이라고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대치는 있었달까... 사람들도 열광하고 있었고 (미국은 먼저 개봉했으니까), 킬리언 머피가 주연으로 나오는 작품은 꼭 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보고 온 영화는, 이번에도 내가 기대한 내용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내가 얻어갈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시사점을 안겨주었다. 전반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다들 우울한 영화라고 했는데, 그건 나는 잘 모르겠다.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을 변호하거나 옹호할 계획은 없다. 그는 천재였고, 그의 머리에는 다른 사람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성격으로는 야망이 있었고, 과학자로서 그걸 실현할 기회를 놓지 않는 용기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져서 우리는 그가 만들어놓은 현재를 살게 된 것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1천 페이지가 넘는 오펜하이머의 평전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3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들여서 그의 삶을 보여준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인간미 없는 모습을, 순수한 모습을, 야망이 있는 모습을, 자만한 모습을, 그 외 우리가 핵무기를 만든 사람이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 모습을 말이다. 과학자가, 이론을 증명하는 는 긴 여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의도에는 애국심은 있을지언정 살생에 대한 욕망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걸 관객이나 제3자가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 3시간인 것이다. '아니 그걸 왜 몰라?'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이 영화는 3시간을 써야 했던 것이다. 이론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과학계에 한 획을 그어보겠다는 순수한 마음, 전쟁이라는 걸 막아보겠다는 애국심으로부터 밖에 나올 수 없는 마음. 전쟁에 나간 군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선한 마음. 그 마음을 원동력으로 핵무기를 만든 것이다. 다 만들어져서, 그 결실을 맺으며 박수를 받았을 때, 그제야 그는 자기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에 대한 단어와 사상에 대해서 강력한 적개심을 느끼고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위험한 조직, 정보를 빼내는 사람들, 사상이 다르기에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오펜하이머는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 환경이 자기에게 마지막에 어떻게 돌아올지 계산하지 못한 채,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한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쳐버린 그 자그마한 것들이 나중에는 다 모여서 자기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와 버린다. 

 

예전처럼 애국심으로만 움직이는 과학자였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는 핵무기를 완성하고 나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한다. 그런 말을 듣지 않는 유능한 과학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선 결국, '사상의 문제'라는 덫을 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누가 프로메테우스냐,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느냐, 왜 만들었느냐, 죄책감을 느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에 대한 이야기 같다. 전쟁의 '끝'이 되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실제로 전쟁을 '끝'내었다는 사실. 하지만 어차피 끝났을 전쟁을 핵무기로 끝냈기 때문에 또 다른 '시작'이 되게 했다는 사실. 수소 폭탄을 만들고 싶다는 또 다른 유능한, 열정적인, 순수한, 애국심에 빛나는 과학자로 인해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 미국이 수소 폭탄을 만들어버리면 소련도 만들 수밖에 없다며 화를 내는 오펜하이머의 말에서 그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나온다. 끝을 내고 싶었는데 시작이 되게 했다는 사실, 이런 시작을 다시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명감, 그것이 그를 마지막까지 힘든 길로 내몰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공적을 굳이 기록한다면 그것은 '핵무기를 만들었다'라기보단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렸다'가 적합할 것 같다. 영화 시작에 이야기했듯이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는 핵무기를 인류에게 쥐어준 대가로 평생을 그 죄를 짊어지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짊어지고 시간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에 우리는 자그마한 인정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이름은 '끝'과 어울린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아직은 영화관에서만 보게 된 걸로 다행이다.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23.08.16 00:17

영화 본 날 :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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