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에 회사에 취직할 때를 이야기하자면(feat. 라떼이야기) 정말 회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없었다. 회사에 대한 정보나 팁을 알려줄 선배나 동기/친구도 딱히 없었고,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걸 알아야겠다는 적극성도 딱히 없었다. 이름을 들어본 회사면 좋은 회사였고, 직무 설명을 들었을 때 재밌어 보이면 희망 직무가 되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입사해서 고생했다. 회사를 몰라서. 내가 무슨 일을 한다고 지원한 건지 뒤늦게 알아서... 두 번의 입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두 번 다 '정보 부족'과 '조사 부족'이라는 죄로 참 많은 고생을 했다.
오늘의 이 글이 모든 것을 커버해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말 최소한 'SI회사'에 지원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미리 알고 지원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원하려는 회사가 SI회사라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한다. IT회사, 개발자 뽑는 회사라고 해서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솔루션 회사라고 해서 다 같은 회사가 아니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1. SI회사의 개발자는 '고객'의 시스템을 개발해주는 사람이다.
SI회사에서 아무리 자기 솔루션이 있고, R&D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강조를 해도 결국 그 개발자는 고객사에 가서 시스템을 개발해주고 와야 한다. 솔루션이라면 솔루션을 설치하고 와야 한다.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회사라면 아주 드물게 모두가 본사에서 일할 수 있겠지만, 결국 고객이 부르면 누군가는 가야 하고 그 실무자는 언제나 개발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무지가 정해진 것 같이 보이더라도 절대 그럴 거라고 믿어선 안된다. 거점이라는 곳이라는 뜻이지 절대 그곳에서 계속 일할 거라고 보장해주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내가 갖춘 능력 외의 능력을 요구받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개발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소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개발하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 집과 정 반대편에 있는 고객사에 가서 일하라고 할 수도 있고, 개발자라고 입사했는데 엉뚱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SI회사는 고객사에게 일정 금액을 받고 당신을 제공하기로 계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계약서에 당신 이름이 들어가 있는 한, 당신은 그 업무를 해내야만 한다.
2. SI회사는 모든 것이 '사람 단위'로 산정된다.
나의 첫 직장은 B2C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그곳에서 일할 때 '인건비'라는 것은 한 개의 제품의 소비자 가격을 break down 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50만 원짜리 물건이라고 치면 그중에 얼마는 원자재고 얼마는 R&D고 얼마는 인건비고 그런 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팀에 몇 명이 일하든, 그 팀이 얼마를 벌어오든 그건 KPI로만 드러나는 문제였지 한 팀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 비용이 발생한다거나 그런 개념이 매우 약했다.
하지만 SI회사는 다르다. 사람 장사하는 회사다 보니 프로젝트에 계약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돈을 벌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런 팀원이 많다는 것은 그 팀은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매주, 매달 손익을 산정할 때 언제나 팀원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얼마를 벌어오고 있는지 정산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SI회사 다니는 사람들 중에 본사 복귀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런 이유였다. "제가 본사에 가만히 있게 두질 않아요. 뭔가 해야 하거나 바로 다른 프로젝트로 보내버려요."라는 피드백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이거다.
3. R&D도 다 비용이다.
예전에 Job Fair를 갔을 때 네이버 리크루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피칭하는 자리였는데 거기서 그 네이버 사람이 자신 있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원이 부족해서 연구 못한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게 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언니는 네이버 주식을 샀더랬다... (나한테 주가가 많이 올랐다고 고마워했다.. 쩝)
그 이후로도 네이버 다녔었던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검색 파트를 맡았다던 그분은 '이 업무에 서버 6대 필요해요. 제가 좀 쓸게요'라고 말하면 바로 그러라고 했었다고 한다. 이 때는 감명이 아닌 충격을 받고 돌아왔었다. '이렇게 쉽게 리소스를 받아낸다고?'
SI회사는 조금 다르다. 나도 인건비고, 내가 무언가를 개발하겠다고 자원을 요청하면 그것도 비용이다. 이 모든 게 마이너스기 때문에 확실하게 그 비용을 들여서 만드는 게 돈을 버는 일이 되지 못하면 승인을 받기가 어렵다. 물론 회사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솔루션이 있거나, 돈을 잘 벌고 있는 솔루션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인건비/자원은 큰 비용이고 엄격하게 산정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SI보다 솔루션 중심의 회사를 간다면 이런 의사결정이 다소 수월하게 이루어지겠지만, 역시나 다 비용으로 엄격하게 산정되므로 엄청 힘든 개발을 진행해야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쩝
4. 내가 브랜드다.
이렇게 삭막한 업계에도 좋은 점이 있으니... 그건 개인에 대한 평가가 매우 중요한 업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많이 발생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유능한 개발자라면 유능함에 맞는 대우를 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평가라는 가정 하에 주변에서도 상대적으로 누가 유능한지 익히 알기 때문에 차별적 대우가 발생해도 쉽게 인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인력 시장이라 사람이 많아서 서로 알기 어려울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업계도 생각보다 작은 편이라 (아무리 프로젝트를 다녀도 결국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 회사 간에 개발자 Reference Check가 가능하다. 고객사가 수행사를 하기도 하고, 수행사가 고객사에 대한 체크를 하기도 한다. 성향, 수준, 성격 등 뭐든 다 체크가 가능한 놀라운 업계가 SI다. 아마도 이건 한 회사에서 박혀서 일하지 않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 특징 때문에 또 SI에서 생기는 특징이 있는데, 그건 이직이다. 프로젝트에서 만나서 마음에 든 사람에게 이직을 권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수행사에서 고객사로 가기도 하고, SI회사 간에 이동하기도 한다. 보통 동종업계로 이직은 금지가 되어 있어서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지만 고객사-수행사가 동종인 경우는 거의 없으니 해당이 되지 않고, SI회사 간의 이직은 Case by Case인데 사람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HR 부서에서 안된다고 막지 않으면 서로 어떻게든 끌어오는 편이다.
나부터도 고객사에서 부른 적도 있었고, 같이 일했던 다른 업체에서 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친해지면 그냥 개인적으로 마구 오퍼를 날리는 놀라운 업계인데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이 업계의 사람들은 개인의 경험이 자산이기 때문이다. 아마 프리랜서가 많은 것도 이런 특징이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처음 취직을 하기 위해 회사를 알아보면 보통은 이 회사가 얼마나 큰지, 좋은 제품이 있는지 등을 견주어보고 그 성장한 기차에 올라탈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성장 가능성을 보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회사로 가는 경우도 있다.) SI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어느 회사를 가든 결국 개인이 남는 게 SI회사다. 회사가 욕을 먹어도 개인은 살 수가 있고, 회사가 망해도 개인은 살 수가 있다. 개인의 능력 하나로 살아남아서 새로운 둥지를 찾아다닐 수 있는 곳이 SI다.
내 첫 번째 직장은 B2C 제품을 팔았는데, 이 회사에서 가장 힘든 건 이 제품을 파는 게 나의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제품이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하지도 못했고, 이 제품이 잘 팔려도 내 덕이 아니라 제품 덕이었고, 이 제품이 사라지면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제품을 팔기 위한 비서 같은 존재였다.
그런 회사를 나와 SI를 온 것은 매우 다른 경험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그 프로젝트는 시간이 지나면 다 과거가 되었다. 근데 그 프로젝트 이력으로 나는 업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쌓일수록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내 주장을 할 수가 있었다. 내 역할에 따라 내 기여를 측정할 수 있었고, 프로젝트 결과에 따라 나의 기여를 모두가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내에서 프로젝트 경험 하나로 내 주변 사람과 다른 평가를 받는 나를 발견했고, 그게 내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직에 대한 오퍼는 여전히 종종 온다. 리멤버 앱에 프로필 업데이트를 2년 동안 안 해서 아마 점점 안 오겠지만 (이직 의사 없다고 표시도 했다) 그래도 그런 게 올 때마다 흐뭇하다.
난 SI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개인이 개인으로 서기 위해서 몸이 많이 망가지고 다 자기만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 나에게 쌓이는 게 있고, 나만 갖게 되는 무언가가 생긴다는 게 계속 이 일을 하게 되는 동력이 되는 것 같다.
SI에 온다면 SI의 특징을 알고 들어오기를 바란다. 인력 시장에 들어오는 개인이고, 개인의 브랜드로 살아남아야 하는 업계다. 힘들지만 보람이 있고, 자유가 없는 것 같지만 특유의 자유도 있는 업계다. 만약 이런 유형의 일이 맞지 않다면 SI회사는 피하길 바란다. 이 회사가 뭐하는 회사인지 모르고 와서 괴로워하면서 퇴사하는 후배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2022.06.27 00:39
'슈르의 오피스라이프 > SI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SI이야기][산출물] SI프로젝트 산출물 목록 (0) | 2023.02.28 |
---|---|
[SI이야기] 경쟁 입찰, 제안 유찰은 무엇인가 (0) | 2022.11.14 |
[SI이야기] 턴키(Turn key)계약에서 현장대리인의 역할 (2) | 2022.06.01 |
[SI이야기] 회의록이 당신의 생명줄이 될 수 있다 (6) | 2022.04.20 |
[SI이야기] 업무 범위는 끊임없이 깎아야 한다 (4) | 2022.03.23 |